알타비아 1일차, 2015.0725.0900
돌로미티에서의 첫 번째 아침이 밝았다. 전날 저녁 늦게 마을에 도착한 탓에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이 곧바로 방에 들어와 잠을 청한 뒤였다. 반쯤 열린 발코니창 너머로 불어 들어온 선명한 산내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나의 의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새들마저 쉴 새 없이 지저귄다. 도저히 일어나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었다. 확실히 도시에서 맞이하던 아침과는 조금 달랐다.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고 문득 생각했다.
호텔 앞을 가로지르는 왕복 2차선 도로는 내 기억이 맞다면 어젯밤 역에서부터 걸었던 그 길이었다. 겨우 차 두대가 아슬아슬 지나갈 정도의 길이 마을의 중심 도로라니. 어쩌면 인구 3천 명 남짓의 이 작은 마을에선 중앙선을 그리는 것조차 사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사실 지금 나는 도로 너머로 높게 병풍처럼 펼쳐진 산세에 시선을 뺏기지 않으려 애를 써보는 중이다.
밀라노에서 미리 내려받아온 ‘돌로미티 공식 등산지도 앱’에 따르면 눈앞의 저 험준한 산봉우리가 바로 오늘 내가 걸어야 하는 '알타비아 1'이 위치한 곳이었다. 게다가 이 똑똑한 앱은 친절한 방위 표시와 루트 미리보기 기능을 통해 내가 오늘 묵기로 예약된 산장이 두 개의 봉우리를 너머서야 위치해있음을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평소 등산은 종종 해봤어도 3박 4일씩 등짐을 메고 트레킹을 해본 경험은 전무했다. 생애 첫 산악 트레킹을, 그것도 알프스에서, 게다가 혼자서 하겠다고 했으니... 방금 전 이곳의 산세가 얼마나 험한지 두 눈으로 확인한 터라 자신감은 완전히 바닥이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나 스스로 알아보고 찾아내 선택한 길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문명(?)에서의 마지막 아침 식사를 여유롭게 즐기는 것, 그뿐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체크아웃한 뒤 마을 어귀의 다른 호텔에 들렀다. 나흘 후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와 도비아코에서의 마지막 밤을 묵기 위해 미리 예약해둔 곳이었다. 이곳의 호텔들은 대부분 트레킹 기간 동안 짐을 맡아주는 서비스를 기꺼이 제공하고 있었다.
어젯밤 나는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밀라노 출장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담았었다. 곧 캐리어 한가득 짐이 들어찼다. 노트북, 셔츠, 구두... 하나같이 산에서는 좀처럼 쓸모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렇게 속세의 물건들은 모조리 호텔 카운터에 맡긴 채 배낭 하나만 덜렁 들고 나왔다. 몸은 한결 가벼져웠지만 처음 신어보는 트레킹화와 두 손에 들린 등산스틱이 어쩐지 낯설었다.
‘알타비아(Alta Via) 1’의 공식 출발지인 ‘브라이에스 호수(Lago di Braies)’로 가는 버스를 벌써 15분째 기다리는 중이다. 도시에서 같았으면 벌써 지하철이나 다른 교통수단을 찾아 빠르게 움직였겠지만 여기선 그럴 수도 없다.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지만 어쩐지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신문을 읽거나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도 꾹 참고 기다렸다.
결국 버스는 5분이나 더 지나 도착했지만 기사님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차를 세웠고, 사람들은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불평 한마디 없이 버스에 올랐다. 여기선 원래 다 그런 모양이었다. 괜히 나 혼자만 마음 졸이고, 의심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어쩐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 애써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브라이에스 호수는 꼭 트레킹이 아니더라도 풍광이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호수 정면의 산장을 끼고 왼편의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거기가 바로 '알타비아 1’의 시작점이다.
오전 10시. 트레킹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험준하고 어려운 길이 펼쳐질 줄 알았건만 호수 주변은 편안한 산책로에 가까웠다. 만년설이 녹아들어 에메랄드빛을 띠는 수면은 웅장하게 펼쳐지는 석회산과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미처 광각렌즈를 준비 못한 탓에 이 멋진 풍경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오후 1시. 호수의 풍광에 홀리듯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지났다. 스마트폰에서 고도를 확인해보니 막 해발 2,000m를 넘어가고 있었다. 지도에 따르면 조금만 더 걸으면 오늘 예정된 루트 중 가장 높은 지점이다. 아마도 아침에 숙소에서 보았던 첫 번째 산을 이제 막 넘어가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오후 2시. 해발 2,400m를 넘는 순간부터 주변 풍경이 마술처럼 바뀌어버렸다. 내 키를 훌쩍 넘기던 침엽수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통 이끼와 풀들만이 가득했다. 바위의 모양과 크기도 방금 전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감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조차 없는 거대한 단층과 화산활동의 흔적들 앞에서는 감히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대자연의 숭고함 앞에서도 한낱 인간이란 제 뱃속 주먹만 한 장기 하나 이겨내지 못하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꼬르륵. 이미 내 배꼽시계는 한 시간도 전부터 떨어져 나갈 듯 울려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돌로미티의 길 위에는 수많은 산장(Rifugio)들이 있다. 그 대부분이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으로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첩첩산중에 있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산속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적재적소에서 음식과 잠잘 곳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저마다 전통과 특색이 넘치는 산장들의 정보를 수집한 뒤 어디서 묵어볼지 결정하는 일 또한 '알타비아 1'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일정을 계획하며 참고했던 '알타비아 1' 표준 일정표에서는 첫날 숙박지로 이곳 비엘라 산장(Rifugio Biella)을 추천했다. 하지만 사정상 아흐레 일정 중 겨우 나흘 남짓 걸을 수 있는 나에겐 맞지 않는 일정이었다. 겨우 여기서 첫날을 마무리하기엔 아직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도 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엘라 산장에서는 간단한 게 점심식사만 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뜨끈한 국물요리를 먹은 덕분인지 속이 아주 든든했다.
비엘라 산장에서부터는 거의 10km 내내 은근한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앞선 오르막에서 보다야 몸은 한결 편했지만 이번엔 삼십 분이 멀다 하고 변덕을 부리는 날씨가 또 말썽이다. 이런 깊은 산속에서 일기예보 같은 건 애초에 아무 소용없다고 했던 게 사실이었다. 방금 전까지 비를 흩뿌리다가 또 거짓말처럼 쨍하고 해가 내리쬐는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아예 우비를 꺼내 카디건처럼 걸치고 계속 걸었다.
오후 4시. 어느덧 산속에서 혼자 걷기 시작한 지 반나절이 지났다. 좀처럼 혼자 여행하는 일이 없었던 나로서는 정말 오래간만에 완벽하게 홀로 된 시간이었다. 휴대폰도 안 터지고, 건물이나 마을은커녕 길 위에는 사람조차 없어질 정도로 지독한 고독이 계속됐다. 그래도 사진은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었는지 돌아와 살펴보니 카메라에 셀카가 제법 있다. 길을 걷다가 적당히 평평하고 낮은 바위가 나오면 어김없이 카메라를 올려두고 타이머를 눌러댔다.
오후 5시. 브라이에스 호수로부터 17km를 걸었을 즈음 페데루 산장(Rifugio Pederü)에 도착했다. 불과 몇 시간 전 2,400m까지 올라갔던 고도는 어느새 다시 1,500m 근방까지 내려와 있었다. 어느덧 일곱 시간째 걷는 중이다. 아침에 호텔에서 가지고 나온 파운드케이크 한 조각을 아끼고 아끼다가 이제야 입에 털어 넣었다.
페데루 산장은 다른 산장들과 달리 고도가 낮은 골짜기 아래에 위치한 까닭에 차를 타고 접근이 가능하다. 때문에 트레킹족보다는 가족단위로 휴양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편이다. 기껏 올라갔던 산을 거의 다 내려왔으니 여기가 오늘의 종착지였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니다. 그래도 '알타비아'에서의 첫날밤만큼은 차도, 사람도 쉽게 닿기 힘든 '진짜 산속'에서 보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정한 걸 어쩌랴. 다시 걷는 수밖에.
결국 나의 원대한 계획은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릴 무렵 가까스로 목적지인 라바렐라 산장(Rifugio Lavarella)에 도착함으로써 무사히 완수되었다. 출발지인 브라이에스 호수에서부터 장장 23km를 꼬박 열 시간 동안 걸어온 셈이다. 마지막엔 조금 힘에 부쳤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더 고요하고, 적막하고, 고독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후회는 곧 환희로 바뀌어갔다.
오후 8시. 해는 저물었고 점심에 먹었던 야채 수프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소화된 지 오래였다. 일단 뭐라도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아 식당부터 찾았다. 나무향 물씬 풍기는 따뜻한 분위기의 식당에는 벌써부터 오늘의 일정을 마친 사람들의 흥으로 가득했다.
포크와 나이프가 정갈하게 올려진 식탁 받침 종이엔 알타비아의 산악 지도가 인쇄되어 있었다. 메뉴판에는 무려 '등산가의 요리(Plato di Alpinista)'라는 추천 메뉴도 있었다. 막 열 시간의 첫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의 흥분을 받아주기엔 더없이 완벽한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그걸 시켰고, 모조리 '흡입'해 버렸다.
7월의 돌로미티의 산장들은 나처럼 고독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산장마다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숙박 예약을 받는데 족히 두 달은 전부터 이메일을 보내야만 겨우 누울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오늘 내가 누울 곳은 다락층 박공지붕 아래 깔린 싱글 매트리스 하나가 전부다. 그리 편안한 잠자리는 아닐지언정 그마저도 조금만 늦었더라면 구하지 못할 뻔했다.
산장 입구에 마련된 방명록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의 흔적 조차 없었다. 과연 내가 그토록 원했던 속세로부터 고립되어 완벽하게 홀로 된 첫날밤이었다. 누워서 가만히 오늘 하루를 돌이켜본다. 비상식량은 조금 부족했고, 핸드폰 배터리가 의외로 빨리 닳았으며,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는 생각보다 성가셨다. 오늘 알게 된 것들은 내일 보완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길 위에서 느꼈던 고독은 어찌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