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문화재단 신사옥 by Herzog de Meuron
전 세계인의 맛집 지도 ‘미슐랭 가이드(Michelin Guide)’는 별 하나부터 셋까지 개수로 레스토랑의 등급을 매긴다. 얼핏 듣기엔 흔히 배달앱에서 보던 ‘별점’ 시스템과 비슷해 보이지만 숨은 속뜻을 알고보면 제법 재미있다. 별 한 개는 ‘여행 중에 근처를 방문하면 들러볼 만한 곳’이라는 뜻, 그다음인 별 두 개는 ‘여행 경로를 바꿔 우회(detour)해서라도 찾아갈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가장 높은 등급인 별 세 개는 ‘오직 이 음식점을 방문할 목적만으로 여행(journey)을 계획해도 후회하지 않을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건축에도 미슐랭 가이드 같은 게 있다면 오늘 내가 찾아가려는 이 건축에는 몇 개의 별을 붙여야 좋을까. 그곳에 도착은커녕 아직 출발도 하지 못했지만 내 마음속에서 만큼은 이미 별 세 개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오직 이 건축을 방문하기 위한 목적 하나만으로 차에 시동을 걸었으니 말이다. ‘송은(松隱)’, 설립자의 호를 따서 ‘숨은 소나무’라는 묘한 이름이 붙은 그 건축의 이름을 또박또박 내비게이션에 적어 넣었다. 조금 뒤 어떤 공간을 마주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만 왠지 이번 여정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지하 5층, 지상 11층, 연면적 약 8,000제곱미터 규모의 건물은 ‘송은문화재단’의 신사옥이다. 지상 1, 2층과 지하 1층은 공공에게 개방하는 전시관으로 설계되었고 상부에는 재단의 사무실이 입주했다. 설계자는 스위스 건축가 자크 헤어초크와 피에르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다. 이들은 지난 2001년 프리츠커 건축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의 수상자이자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히 작업을 펼치는 건축가로 명성이 높다.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이나 일본의 ‘프라다 아오야마’, ‘미우미우 아오야마’ 등 아시아에도 여러 작업을 선보였지만 우리나라와는 오래도록 인연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송은’은 헤어초크 드 뫼롱이 한국에서 선보이는 첫 번째 작업이다.
처음 공개된 다소 파격적인 외형의 투시도만큼이나 이들의 국내 첫 작업이라는 사실 자체가 화제가 됐다. 완공에 맞춰 기획된 개관전은 사전 예약을 마친 한정된 인원에 한해서만 도슨트 투어를 실시하고 있었다. 전시의 내용 또한 헤어초크 드 뫼롱의 과거 작업들과 모형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이곳을 찾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시보다는 공간을 보기 위한 목적일게 분명했다.
올림픽대로 한편으로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수면 위로는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때문인지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한 번씩 차가 멈춰 설 때마다 머릿속으로 지금 찾아가고 있는 건축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공개된 언론 보도자료나 건축가의 인터뷰 따위를 여럿 찾긴 했지만 일부러 읽는 둥 마는 둥 봤다. 너무 많은 정보를 미리 알게 되면 오히려 현장에서 공간을 마주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오로지 스스로의 감각에만 의존하여 온전히 새로운 건축을 느껴보고 싶었다. 다만, 마치 제도판 위에서 쓰던 60도 삼각자를 옆으로 들어 세워놓은 듯한 날카롭고 독특한 외관만큼은 스치듯 봤음에도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잘 잊히지 않았다.
계속되는 정체에 부옇게 빗방울이 내려앉은 앞유리를 닦기 위해 와이퍼를 켰다. 순간 못 견딜 만큼 궁금한 게 생겼다. 대체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그 건축은 내리는 비에 어떻게 젖고 있을까. 극도로 절제된 표현의 파사드(façade)에는 문도 보이지 않고 창문도 단 두 개가 전부였다. 건축이라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보이는 단일한 재료의 볼륨은 분명 이른 아침부터 내린 비에 젖어 본래의 색깔보다 조금 더 진하게 변해 있을 터였다.
꼭대기에서부터 마치 만년설이 내려앉듯이 그라데이션을 만들며 젖어들고 있을까. 아니면 흩날리는 빗방울을 온 사방으로 흡수하며 전체적으로 비슷한 색으로 변해가고 있을까. 어쩌면 부정형의 조형 때문에 빗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려 자칫 길고 지저분한 자국을 남기며 외벽을 더럽히고 있지는 않을까.
출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오랜만의 외출에 영 어울리지 않는 비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던진 엉뚱한 질문 덕에 이제는 도리어 내리는 비가 반갑기까지 했다. 하품이 나도록 꽉 막힌 길도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가고 나의 작은 호기심은 곧 만나게 될 건축에 대한 기대감으로 변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