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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문하는여자 Jun 06. 2020

건강한 유산, 집밥


  자라면서 엄마의 음식을 맛있다고 여기거나 자랑스러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대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집 밖의 음식을 접한 나는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다. 다양한 메뉴와 입맛 당기는 자극적인 음식들을 먹으며 엄마의 요리 솜씨가 없음을 개그 소재로 삼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농사일에 사 남매를 키우느라 삶이 녹녹지 않았던 엄마는 아빠 위주의 삼시 세끼를 차려내기도 벅찼고 아이들의 입맛을 맞춘 음식을 할 여력이 없었다. 경북 내륙의 깡촌인 우리 집 여름 식단은 밭에서 나는 나물과 된장이 주였고, 겨울에는 말린 나물과 저장한 김치로 맛을 낸 국이 전부였다. 그러니 어린 나에게 엄마의 음식이 무엇이 맛있었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내 손으로 상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엄마의 음식이 하나둘 소환되기 시작했다. 그토록 맛없다고 느꼈던 엄마의 음식이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나 몸과 마음이 허할 때마다 떠올랐다. 하지만 엄마의 음식은 하나같이 식당에서 사 먹을 수 없는 류의 것들이었고 비슷한 메뉴가 있다한들 그 맛은 달랐다.  


 엄마의 음식이 생각났던 첫 기억은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할 때였다. 남편을 위해 뭔가 그럴듯한 상을 차리고 싶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먹던 소고깃국이 떠올랐다. 무와 대파로 시원한 맛을 낸 경상도식 소고깃국은 사 먹으려 해도 서울에서 찾기란 힘들었다. 엄마에서 전화를 해서 조리법을 받아 적고 요리를 시작했다. 분명 시키는 대로 재료를 넣고 간을 보는데 엄마가 끓여준 그 맛이 아니었다. ‘그래 이 맛이야’를 느끼고 싶어서 조미료를 넣고 다시 국물을 맛봤지만 좀처럼 속은 달래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엄마 음식에 대한 갈증은 찬바람이 불거나 무더운 여름이면 더 자주 생각이 났다.      

 한 여름에는 가지를 살짝 삶아 결을 따라 찢어내고 시원한 물에 마늘과 소금으로 맛을 낸 가지냉국이 간절했다. 여린 콩잎과 깻잎을 쪄서 된장과 고추장에 비빈 밥을 싸 먹으면 더위에 집 나간 입맛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들에서 갓 따온 야들야들한 풋고추에 밀가루를 입히고 채반에 찐 후 집간장과 마늘로 간을 한 고추찜을 비롯한 엄마의 반찬은 마트에서 산 재료들로는 도무지 그 맛을 낼 수 없었다.  

  팍팍한 서울살이로 유독 추운 겨울이면 엄마의 국물이 그리웠다. 삭힌 백김치에 겨울 무를 채 썰어 넣고 생콩가루를 넉넉히 뿌린 다음 쌀뜨물을 넣어 자박자박하게 끓인 콩가루국은 겨울 아침상의 단골 메뉴였다. 김 폴폴 나는 구수한 국물을 떠먹다가 양념장을 넣어 비벼 먹는 그 맛이 어른이 되니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지. 장날에 동태 한 마리를 사 오는 날이면 엄마는 잘 익은 김치와 무, 콩나물을 넣어 한 냄비 가득 동태국을 끓였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동태살과 두부를 덜어주고 나면 엄마의 국에는 김치와 동태 대가리밖에 없었지만 여섯 식구의 배를 든든하게 해 주던 겨울 특식이었다.


 삼시 세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엄마의 요리는 닭개장이다. 토종닭을 푹 삶아서 살을 발라내고 닭 육수에 가을에 말린 여린 배추 시래기와 토란을 듬뿍 넣어 끓인 닭개장은 엄마의 음식 중 유일하게 솜씨를 인정하는 메뉴이다. 첫째를 낳고 밤낮없이 모유 수유하느라 몸이 축났을 때였다. 예민한 아이 때문에 끼니조차 제때 먹지 못했고 아이를 재워놓고 먹는 밥은 먹고 또 먹어도 허기가 졌다. 수유를 하느라 살이 빠진 딸이 안쓰러웠던 엄마는 닭개장을 한 냄비 가득 끓여왔다. 걸쭉한 국물을 퍼먹고 보드라운 배추 시래기를 건져 먹은 다음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서 먹고 나니 그 어떤 산해진미로 채워지지 않던 허기가 채워졌다.           


 엄마의 음식은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구하기 힘든 귀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고 맛깔난 모양새도 아니다. 달고 짠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식당을 차리면 딱 망하기 좋을 음식이지만 신기하게도 나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집밥이다. 어릴 때 먹었던 그 맛이 몸 깊숙이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맛을 새기는 작업이다. 한번 새겨진 입맛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두 딸의 식탁에 가능한 제철 음식을 차려내고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강한 양념 맛은 최소화했다. 입맛을 당기는 자극적인 맛이 아니고 다소 거칠지만 그것이 건강한 맛이라고 가르쳤다. 어쩌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딸들도 엄마의 음식이 맛없다며 투덜거릴 수 있지만 나의 집밥은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건강한 유산이라 믿는다. 엄마가 나에게 물려준 입맛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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