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한강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를 힘겹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이 겪는 우울증이나 분열증은 육식으로 표현되는 폭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에 기인한다. ‘채식’이란 말 자체가 여성을 식물로, 약자의 범주로 상정하였음을 글을 읽는 내내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은 인간의 내면 깊이 새겨진 상흔을 표출하는 고통스러운 언어로 가득하다.
『소년이 온다(2014)』는 『채식주의자』와는 결이 좀 다르지만 5월 광주라는 역사적 의미와 애도에 중점을 두었다. 이 소설 또한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섬세한 언어표현 속에 짙은 상처의 그림자가 켜켜이 쌓여 인물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순간 시름은 분노가 되고 울먹임이 되어 오래도록 짙은 잔상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한강 작가가 두 작품의 중간 시기에 발표한 『희랍어 시간(2011)』은 한강의 소설 중에서 언어와 소통의 문제를 전면에 다룬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언어나 기호의 울타리를 넘어서 철학적인 사고가 엿보인다. 한강 소설의 특징을 시적산문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이 그러하다. 줄거리를 파악하고 싶다면 이 책은 사건의 전개가 더디고 더디다. 다양한 주제가 공존하고 현실과 관념이 얽히며 의미가 여러 겹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이 소설을 쓰기까지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것으로 안다. 한강소설은 무게감이 남다르다. 어쩌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희랍어 시간』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이야기다. 남자는 눈을 잃어가고 여자는 말을 잃어간다. 여자는 세상의 존재는 감지하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체계화하고 번역하여 자기화할 언어형식이 부재하다. 그러니 침묵할 뿐이다. 남자는 의미를 논리적으로 구축할 지성이 있지만 그 형식을 외형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부재하다. 남자의 행동은 인위적인 노력에 그치고 존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삶은 늘 공허로 가득하다.
이런 단절의 관계를 한강은 소설의 제1장에서 보르헤스의 유언을 인용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p.7)
‘칼’은 두 대상 사이에 근접할 수 없는 경계를 그어버린다. 소통할 수 없는 언어는 의미가 없어지고 공간은 안정감이 없는 공포의 장소가 되어버린다. ‘칼’을 경계로 오롯이 혼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고독하고 힘든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남자와 여자는 그들의 속성과 유사한 낯선 언어의 세계에 빠져든다. ‘칼’의 경계를 허무는 것, 바로 ‘희랍어’의 세계이다. 고대 그리스어인 속칭 희랍어는 수천 년 전에 소멸된 죽은 언어이다. 남자는 독일에서 희랍어를 전공하며 안정감을 찾았고 여자는 희랍어에서 언어의 소멸을 넘어 일상의 회복을 꿈꾼다. 남자는 희랍어를 가르치고 여자는 희랍어를 배운다. 희랍어는 날 선 칼의 세계를 위태롭게 이어주는 끈이다.
Χαλεπά Τά Καλά
칼레파 타 칼라
소설 속에 나오는 이 말을 검색해 보니 일반적으로 ‘좋은 일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라는 말로 단순하게 해석하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그 의미를 삼층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가지 해석은 모두 다르지만 희랍어의 체계 안에서는 모두 참인 표현이다. 잘 생각해 보면 언어란 이런 것인지 모른다. 예를 들어 고대 희랍인들에게 인생은 아름답다. 인생은 어렵다. 인생은 고결하다란 말은 다르지 않은 같은 관념의 표현이다. 단어의 의미가 개별이 아닌 하나 속에 덩어리로 존재한다. 희랍어는 언어의 특성상 의미를 세분화하여 분절하지 않는다. 의미가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변한다. 남자와 여자가 희랍어에서 소통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서로 달라 보이는 의미들이 충돌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기 때문이다.
희랍어를 매개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만나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기척이 만났을 뿐이다. ‘기척’, 서로 있는 줄 직감할 뿐이었다. 희랍어의 완정한 언어체계는 개별화된 언어의 낯선 환경에서 의미를 잃고 말았다. 그 찰나의 장면을 한강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중략) 눈을 뜨지 않는 채 그는 입 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중략)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p.184)
영원히 어긋나는 두 사람은 부표처럼 떠도는 희랍어의 물결 위해 서로를 응시하는 것으로 보듬어줄 뿐이었다. 남자의 시린 과거도, 여자의 알 수 없는 침묵도 서로의 경계를 허물수는 없었지만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용인된 것은 분명했다. 둘은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었으며 어떤 이상도 공유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소통하였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마침내 첫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p.191)
한강 작가는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어설픈 두 존재의 해후나 타자를 배려하라는 윤리적 가치로서는 소설을 설명하기 힘들 것 같다. 작가는 오히려 사멸해 가는 언어를 핑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어둠과 침묵이 만나 빛과 같이 반짝이며 소통하는 순간에 주목했는지 모른다. 순간이 영원처럼 빛나는 찰나말이다. 인생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그 의미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한다면 버리거나 분절해야 할 것이다. 마치 희랍어를 배우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