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8톤 트럭을 몰았다. 화물을 싣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아빠가 서울로 올라가고 나면 엄마와 어린 세 딸들은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잤다. 아빠와 엄마의 고단함은 자세히 모른 채, 나와 두 여동생들은 집으로 들어오는 아빠한테서는 기름 냄새가 난다는 것과 가끔씩 바나나 송이 같은, 그 시절에는 귀한 물건들을 가져오신다는 것을 어슴푸레 알아갔다. 아빠가 집에 오면 막내 동생은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춤을 선보였고 엄마는 나와 둘째 동생의 성적표며 상장을 꺼내어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셨다. 말수가 적은 아빠는 보다가 듣다가 하셨고 다음날이면 깨끗한 옷을 입고 트럭을 몰아 다시 도로 위를 달리셨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방 넷의 이층집으로 이사를 했고, 아빠는 1톤 용달로 차를 바꾸셨다. 수입화물을 실어 나르던 대형 트럭 일은 힘에도 부치셨고 트레일러에 밀려 일감도 줄어들었다. 아빠는 가끔씩 “고속도로에 내 청춘을 바쳤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마흔 중반부터는 부산 시내와 인근 지역으로 골목골목 짐을 옮기며 일하셨다. 하루 일을 마치고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시는 아빠는 더 이상 말수가 적은 분이 아니셨다. 8톤 트럭을 몰 때와 달리 우리는 매일 저녁 아빠를 볼 수 있었지만 그즈음엔 각자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그러다 동생들은 교사로 발령을 받아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대학 졸업 후에 회사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졸업장만 있을 뿐 요즘 말하는 스펙 하나 없었지만 자존심만은 대단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눈치가 보였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9시에 출근하는 삶이 목표가 되었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공무원 시험을 보았고, 스물아홉 첫 출근이 시작되었다.
9시 출근하는 삶을 처음에는 ‘정상인’의 삶으로 당연하게 생각했다. 월급을 받고 저축을 하고 작은 아파트를 사서 독립을 했다. 서툴렀던 일들이 손에 익었고 직급도 올라 중간 관리자가 되었다. 조직의 언어도 생리도 익숙해졌다. 나의 언어도 어느새 간단명료하게 요점을 말하고 결과로 넘어가는 패턴이 되었다. 부모님 집에 들러도 머무르는 시간이 짧아졌고 긴 대화에 실린 오래 묵은 감정들이 불편했다. 일상은 충전과 방전이 반복되는 모양새로 흘러갔다. 출근이 목표였던 삶은 이십년이 넘으면서 수명이 다했다. 마흔 아홉, 나는 퇴직을 결심했다.
퇴직을 결심한 순간 왜 글을 쓰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개인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이직을 해서 월급 받고 사는 것은 더군다나 싫었다. 싫은 것은 안하고 살고 싶었다. 글 쓰는 것은 그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상의도 없이 선택한 퇴직을 부모님께 바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두 분에게 ‘믿음직한’ 첫째인데 오래된 믿음에 폭탄을 안겨드릴 용기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말씀드리는 순간 엄마는 쓰러지실 것 같았고 아빠는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면서 일 년이 흘러갔다.
“잘했다.”
무거운 꿈을 꾸고 난 다음날 집 앞 공원에서 아빠에게 퇴직을 말씀드렸다. 순서도 없이 흘러나온 내 말이 끝나고 아빠의 첫마디였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어쩌면 황당한 계획에도 그렇게 해라 하셨다. 평생 조직 안에서만 일하는 인생은 아깝다고 덧붙이면서. 연금이 있으니 공무원이 좋구나 하시며 웃으시기도 하셨다. 나는 예상이 빗나간 상황이 꿈인 것 같아 타고 있던 아빠 차를 둘러보았다. 손글씨로 거래처를 빼곡하게 적어놓은 수첩이 보였고 어릴 적 맡았던 화물차 기름 냄새가 났다. 아빠는 이야기를 이어가시다가 아직도 어리둥절한 나에게 물어보셨다.
“일 년을 지내보니 어떻노. 니 지금 행복하나?”
순간 내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행복을 묻는 질문은 변명만 가득했던 내 시나리오엔 없던 문장이다. 아니, 평생 아빠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단어였다. 오십이 된 딸은 팔십의 아빠 앞에서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고, 그렇다는 답을 들으시고는 커다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셨다.
“그럼 됐다.”
나만의 논리로 그동안 혼자 키우던 원망이 조용히 무너졌다. 오래된 나무처럼 같은 자리에서 뿌리내리고 있던 아빠를 나는 그제서야 자세히, 아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