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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봄 Mar 02. 2023

생강차

오늘도 잘 쓰겠습니다

여느 날과 같은 아침이다.      


이불 밖으로 나온 발에 느껴지는 공기가 아직은 차갑다. 다섯 시 사십분. 눈을 붙이려 해도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일어나서 생강차를 끓이자. 한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던 경민이 올해는 유난히 추위를 탄다고 하자 경혜는 말린 생강차 한 통을 보내왔다. 뜨거운 물을 붓고 천천히 한 잔 마시고 나면 온 몸에 온기가 돌면서 이마에도 살짝 땀이 맺힌다. 커피의 유혹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올 해 겨울은 카페인 보다 그 온기에 끌린다.      


물이 끓고 있다. 무슨 꿈이었더라? 경민은 언제부턴가 전날 밤 꿈을 더듬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의식하지 못한 길을 또 다른 자신이 헤매다 아침을 맞이하고 그것을 이어받아 낮을 살아간다는 느낌이 점점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누군가와 함께 들판을 달리고 바다 위를 날았구나. 머리카락이 날리며 속도감을 느꼈다. 들판을 달릴 때는 흑백이었다가 바다로 장면이 바뀌자 파란빛이 눈부셨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잠이 깼다. 뭐지?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건가. 하긴 한동안 너무 조용히 살았지. 최근에 가장 멀리 가 본 게 언제였더라. 작년 봄, 경혜와 일박이일로 다녀온 순천. 그리고 가을쯤 당일치기로 서울에 갔었지.    

   

경차에서 SUV로 바꾼 기념이라며 경혜가 순천 여행을 제안했을 때 경민은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둘은 입사 동기로 만나 십오 년을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름이 각자의 동생과 같다는 우연을 계기로 가까워졌다가 장녀에 모범생 기질까지 비슷해 무난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었다.      


“경민아, 뭐 새로운 소식 없어?”

“있겠니. 그날이 그날이야.”

“난 솔직히, 세상이 다 같이 망했으면 좋겠어.”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다 같이 살아야지. 행복하게.”

“넌 그런 생각 해 본적 없어?”

“부서장이 많이 쪼우니? 상을 꼭 받아야 한다고?”

“진급이 코앞이잖아. 뭐든 좋은 보고거리 만들어야 될 입장인거 이해는 해.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상급기관 평가가 뭐 그리 대수라고 아침마다 신경을 곤두서게 하냐고”

“그러게. 기본 업무는 늘 뒷전이지. 당연하게 생각하고.”  

   

순천은 세 시간을 달려 올만했다. 경혜는 운전으로 지칠 만도 한데 국가정원에 조경된 꽃을 보며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다. 평가 자료에 대한 걱정은 어느 새 물러난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경민이 물었다.    

  

“경혜야, 우리가 부족한 게 뭔 줄 알아?”

“갑자기? 부족한 거야 많지 뭐. 요즘은 체력? 수면도 부족한 것 같고.”

“웃음이야.”


“뭐야. 그 자기계발서 같은 단어는.”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거든. 내 능력만큼 이루었고 가진 것도 없지 않고. 근데도 편안하지가 않아. 뭔가 항상 부족하게 느껴. 그게 무엇 때문일까 하고.”

“결론이 웃음이라고?”

“우리 둘 다 그래. K장녀잖아. 진지하고 실수와 지적에 취약하고.”

“음, 틀린 말 아니네. 지적 당할까봐 미리 고민하고 해내야하고. 근데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웃을 시간이......없었네. 해결방법은 뭐야? 웃음교실 같은 데서 하는 것처럼 하하하 박수치고 웃어야 하나”

“응. 요즘 시간 정해서 웃고 있어 나.”     


경혜는 피식 웃는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표정이다. 


“힘 빼기라고 생각해. 흐늘흐늘 해지는 거. 음과 양, 긴장과 이완. 이게 한 세트라고 생각해. 우린 너무 한쪽에 힘주고 살았어.”     


물이 다 끓었다. 말린 생강 두 조각을 컵에 넣고 물을 붓는다. 어둠이 물러나고 날이 밝고 있다.      

경민은 문득 며칠 전 다녀왔던 전시회가 생각났다. 일러스트 작가들이 매일 100일간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다. 블로그에 올라왔던 그림이라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실물은 또 다른 감흥을 주었다. 작가의 힘이 가깝게 느껴졌다. 매일의 정성과 약속이 담긴 그림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루, 이틀, 사흘......마침내 백일. 전시는 시작과 지속의 결과물이었다.      


“백일 동안 매일 그리다니 작가님 대단해요!”

“누가 시키는 거 아니고, 제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는 게 좋더라고요.”

“저는 누가 시켜야 겨우 쓰는데, 뭘 그릴지 매번 정하는 거 어렵지 않던가요?”

“음.....좋아하는 것부터 그렸어요.”     


작가님의 그림에는 할머니, 엄마, 조카. 그리고 매일 걷기를 했던 본인, 커피 잔, 새가 있었다.     


생강차 한 잔에 몸 안과 밖이 찌르르 하면서 열기가 돈다.      


좋아하는 것. 그것으로 시작해본다는 거지. 

좋아하는 생강차를 마셨으니, 이제 좋아하는 아침 산책을 해볼까. 

어제 발견한 올해 첫 매화와 눈인사 또 나누고 오자.    

 

이월 지나 삼월. 

언제나 시작인 매일을 경민은 또 맞이할 준비를 한다. 

흘러가는 시간과 계절에 부드럽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엽편소설 형식입니다. 소설 연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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