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어머니만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일리야 레핀, 1884~1888년

by 루시

“엄마, 무슨 잔치해?”

“얘는 무슨 잔치야. 이걸 누구 코에 붙인다고.”

잡채를 섞으면서 엄마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누구 코에 붙일 정도의 양이 아니라 잔치 음식 정도의 스케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항상 음식이 남았다. ‘남는 건 괜찮지만 모자란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부엌 주관자인 엄마의 신념에 따라 음식이 모자란 적은 결코 없었다. 반찬도 가짓수가 넘쳐났다. 엄마를 제외한 다른 식구들은 5첩이면 아주 많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10첩도 적다고 생각했다.(우리 엄마, 혹시 전생에 왕족이었을까?) 아버지는 그런 엄마에게 농담으로 ‘우리 집은 한정식집’이라고 말하곤 한다.

엄마는 우리 식구 중에서 누구보다도 큰 스케일을 자랑했다. 비단 음식의 얘기가 아니다. 호방한 성격에 인심을 쓰는 것도 통 크게 한다. 나는 그런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우리 엄마는 꺽진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그래서 어릴 적, 엄마는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물론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귀여움을 받았지만 엄마는 추상과 같은 불호령, ‘한 칼’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 자식은 필요 없다.’고 화가 나서 말을 할 때에는 오소소 등줄기로 한 줄기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엄마는 자식을 버릴 수 없어도 우리 엄마는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로 자식을 버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성격도 불 같았다. 아버지는 유한 성격이었고 크게 화를 내는 것도 크게 기뻐하는 것도 없는 잔잔한 사람이라면 엄마는 정반대였다.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분명히 말하며 화를 표출했고 기쁘고 좋은 것은 큰 웃음으로 즐거워했다. 그렇다고 감정적인 사람이었냐고 묻는다면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고쳐서 말해야 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논리로 다투는 것에서 엄마가 지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보통은 화가 나면 말이 꼬이기 마련인데 엄마는 그런 순간이 되면 오히려 더 논리적으로 잘 따져 들었다. 분명히 나에게는 없는 자질이었으니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감탄, 아니 경탄해 마지않았다.

게다가 엄마는 자존심과 자존감이 높은 여인이었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기가 죽는 것은 특히 싫어했다. 아마 어느 한 나라의 왕이 온다고 해도 엄마는 그 사람에게 비굴하게 쩔쩔매거나 이유가 없는 한 바보 같은 웃음을 무조건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식에게 거는 기대 또한 남달랐다. 세상 어느 부모가 안 그럴까 만은 자식이 잘 자라나 제 밥벌이를 톡톡하게 해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아니 대놓고 간절하게 바란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식들 뒷바라지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기도 했고.

‘내가 나중에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고 해서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혼자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답은 ‘아니’ 었다. 나는 엄마의 어쩌면 신앙과도 같은 그 지독한 모성애를 생각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젓게 된다.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점철된 엄마의 모성애에 나는 질렸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모성애가 학창 시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직장을 다닐 때에도 엄마는 학창 시절과 똑같이 자식들 아침밥을 챙기는 것을 아주 신성한 의무로 여겼다. 하루는 엄마가 늦잠을 잤다. 당연히 나는 엄마가 피곤해서 그러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빨리 나갈 채비를 마쳤다. 물론 밥은 먹지 않았다. 내가 준비하는 소리에 깼는지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로 엄마가 나와서 허둥거렸다.

“날 깨우지 그랬어?”

실소가 나왔다.

“내가 왜 엄마를 깨워?”

“너 밥 해줘야지.”

“엄마, 나 이제 성인이야. 내 밥은 내가 알아서 먹고 나가.”

“그래서 너 밥 먹었어?”

“그럴 시간 없어.”

“그럼 손해잖아.”

“무슨 손해야? 내가 밥 안 먹고 나가는 게 무슨 손해야.”

“내가 손해 보는 거지. 새끼가 밥을 안 먹고 나가는데 이게 무슨 막대한 손해야.”

엄마는 속이 상한지 입이 나와 있었다. 큰 손해를 입은 사람처럼. 아니 밥을 안 먹었으면 내가 손해면 손해지 무슨 엄마가 손해란 말인가? 새끼의 배가 채워지지 않으면 본인의 손해가 '막대하다'는 것이 우리 엄마의 기가 막힌 셈법이었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지각할 것 같아서 그냥 간다는 말만 남기고 고개를 흔들면서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유년기의 펄펄 끓는 사랑을 성인이 된 자식에게도 그대로 쏟아붓는 활화산 같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있었기에 나는 풍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아직도 모르던 시절, (물론 지금도 백 프로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엄마를 실망시킬까 봐 속으로 전전긍긍하던 때가 있었다. 남들에게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엄마는 나에게 얼마나 실망할까.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엄마는 오히려 그런 나를 더 사랑했으면 사랑했지 실망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런 나를 안쓰러워했다면 모를까. 그리고 내 새끼를 이렇게 속상하게 만든 세상을 향해 화를 냈으면 냈지 나를 향해서 실망하거나 분노를 터뜨린 적은 결코 없을 사람이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jpg [From : Wikimedia commons]

그래서 러시아 작가인 일리야 레핀의 이 그림을 봤을 때 나는 우리 엄마를 보는 것과 같은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아들이 돌아왔다. 유형지에서 몇 년 만에 돌아오는지 모를 혁명가 아들은 피골이 상접했다. 그의 얼굴에는 그간의 피로가, 고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 속에서도 일말의 불안한 기색이 스친다.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소식이 끊긴 상태였나 보다. 나의 귀환을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의 피 말리는 내면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혁명가였다면, 그 혁명가가 유형지에 갔다면, 그의 혁명은 실패였을 것이다. 체재의 전복을 꾀했을 그가 실패했을 때, 낙인찍힌 그 가족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족들은 연락이 끊긴 그를 이미 죽었으려니, 어차피 연락은 되지도 않으니 돌아오지도 않을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문을 열고 안내해준 하녀의 얼굴도 무표정, 그 자체이다.

“어머니, 어서 와서 누가 왔나 보세요. 어머니가 기다리던 아들이라고요!”

라고 큰 소리로 목메게 말하는 기색은 그림에서 1도 찾아볼 수 없다. 피아노에서 몸을 돌린 부인에게서는 놀라움이 묻어난다. 아무 기별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남편. 지금 그는 거의 거지 같다. 덥수룩한 수염에 옷은 남루하다. 그 잘난 혁명에 목을 매더니, 처자식 제쳐두고 바깥으로 나돌더니, 쫄딱 실패하고 이제야 나타난 남편을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맞이할 수 있을까? 기뻐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그녀는 아직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어린 남매의 반응도 극적이다. 큰 애는 아빠를 기억하는지 반가운 기색을 내비친다. ‘우와, 드디어 아빠가 왔구나!’ 하지만 막내는 무슨 무서운 것을 본 듯한 얼굴이다.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에서 그녀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전무함을 읽을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엄마가 가장 크게 기뻐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등을 보인 혁명가의 엄마는 살아 돌아온 아들이 무엇보다 장할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는 그 사실, 그 한 가지 만으로도 엄마는 이제껏 기다린 보람을, 본인이 살아온 날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된 것 같은 기쁨을 느낄 것이다.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들에게로 향하는 몸동작에서 그 무엇보다도 기쁜 환희의 인상을 받는다. 노구를 벌떡 일으켜 세워 움직이게 만드는 그 강력한 원동력은 러시아의 추위를 다 녹일 것처럼 절절 끓어오르는 모성애일 것이다. 아들의 눈이 아직도 형형한 것에서, 비록 몸은 상했을 지라도 정신은 상하지 않았음에, 엄마는 자부심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만은 기다렸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세상에 지치고 상처 받아도 우리의 어머니만은 만신창이가 된 우리를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우리가 어머니의 품 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주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