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 렘브란트 반 레인, 1668-1669년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하고 아버지에게 말을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했다.
모든 것을 탕진했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했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유명한 루카복음의 15장을 담고 있다. 렘브란트 특유의 극적인 빛과 그림자의 사용이 빛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무대의 주인공 둘을 스포트라이트가 비추고 있다. 아버지와 그 옆에 선 큰아들이다.
아버지. 아버지는 늙고 노쇠했다. 그의 얼굴을 보라.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그는 지금, 무사히 돌아온 거지 같은 아들을 부둥켜안고 그저 아들이 몸성히 돌아온 것에 안도하며 기뻐하고 있다. 여러 해 전 당당히 자신의 몫을 요구하며 떠났던 빛나던 아들의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에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아들이 거지꼴로 돌아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도 없다. 그냥 나를 날품팔이꾼으로만 받아달라고 용서를 구하고 있다. 작은 아들의 얼굴은,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그 이목구비도 알아볼 수 없게 표현되어 있다. 그 당당하던 자식 놈이 거지꼴로 돌아와 얼굴도 들지 못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금지옥엽 키운 자식이, 거지가 되기까지 겪었을 신산한 고생살이가 아버지의 마음을 날카로운 바늘처럼 찔렀을 것이다. 그래도 아비라고 찾아왔는데 어떻게 내칠 것인가. 비록 초점은 잃었을지언정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을 품어주겠다는 초점은 분명히 느껴진다.
특이한 점은 작은 아들을 보듬고 있는 그의 왼손과 오른손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고운 오른손은 어머니의 섬세한 사랑을, 두툼한 왼손은 아버지의 너른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세심하게 자식의 모든 것을 보듬어주는 부모의 사랑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초점 잃은 눈으로 아들을 보듬어주는 아버지와 다른 이가 여기 한 명 있다. 또 하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큰 아들이다. 안도하는 표정의 아버지와 달리 그의 얼굴을 차갑게 굳어 있다.
왜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아버지 재산을 유흥으로 맘껏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베풀어준 적이 없는 자애를 베풀고 있는데. 아버지와 함께 고생을 하고 재산을 지킨 사람은 본인인데 놀고먹고 마시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아버지는 다시 용서하고 받아주려고 하고 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도대체 나는 뭐란 말인가. 아버지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동생처럼 망나니와 같은 생활을 하고 돌아와도 아버지는 나를 똑같이 받아주실까?
그는 지금 너무 괴롭다.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를 제치고 동생의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 염치없는 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걸어 들어와? 그 꼴을 하고 여기에 오고 싶더냐? 어서 썩 나가지 못해? 네 몫을 가지고 나갔을 때부터 너는 여기와 관계없는 사람이다. 우리 사이에 정리는 수년 전에 네가 이 집을 나갔을 때 다 끝난 거다. 아버지, 아버지도 정신 차리세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요. 계속 이렇게 아버지가 역성을 드니까 쟤가 사람 구실 못하는 거라고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을까? 오른손으로 꼭 쥔, 그래서 하얗게 변한 왼손이 ‘부르르’ 떨리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다. 겉으로는 침착을 가장하고 화를 냉정하게 참고 있지만 지금 그의 속은 ‘볼케이노’다. 여기서 모든 것을 확 뒤엎을지 말지, 그는 지금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마지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는 않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인 작은 아들을 살펴보자. 그는 거지다. 지금 아버지에게 구걸을 하고 있다. 날품팔이꾼으로 자신을 받아달라고, 무릎을 꿇고 해진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아버지에게 빌고 있다. 확률은 반반,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주거나 아니면 내치거나. 그는 지금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여기, 당도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내치지 않았다. 그를 보듬어 주었다. 면목없는 그의 얼굴 표정은 알 수 없다. 뵐 면목이 없는 그의 얼굴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렘브란트라는 거장만이 가진 기교 아닐까. 그러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서 형의 눈치를 살피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보다도 더 걸렸을 형의 안색을. 한치 건너 두치라고 아버지는 나를 용서해도 형은 끝내 나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버지와는 모든 것이 눈 녹듯이 녹아버려도 형과는 상처에 딱지가 앉듯이 평생 그 딱지를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차갑게 굳어버린 형의 얼굴을 보면서 동생은 그런 직감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가 숱하게 마주치는 삶의 고민과 그 결을 같이 하고 있기에 그런 것 같다. 잘못을 하고 용서를 구하고 보듬고 용서하고. 가장 친한 피붙이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면서도 가장 많은 상처를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 모든 것이 나를 버려도 누군가 나를 받아줄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세상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