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점심식사-에두아르 마네, 1863년
시애틀의 한 college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친구는 일 년에 한 번, 여름방학에 귀국한다. ‘모더나(백신 중에서 이리저리 비교를 해보고 고른 것이라 함)’를 맞고 귀국한 친구는 자가격리 대상자는 아니었다. 검사는 받은 모양이지만 결과는 모두 음성. 그래서 예정했던 대로 같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인데 졸업 후 영국에서 유학하고 일을 하다가 국내로 귀국해서 일을 했고 그 후로 본사가 있는 시애틀로 가서 영주권을 얻은 후, 바로 회사는 때려치웠다. 왜? 그녀 역시 몸이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허리가 아프고 두통에 시달리고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역시 퇴직의 분수령은 몸이 보내는 신호다.
영리하게 회사를 레버리지로 영주권을 얻은 후로는 ‘교사일’을 시작했고 내내 그녀의 전공인 수학을 가르치려니 생각하다가 올해 무심코 물어보니 ‘컴퓨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엥? 컴퓨터?
자바 스크립트, C언어, HTML 등
그럼 너 플랫폼 비즈니스 할 수 있겠다.
어 항상 염두에 두고는 있지. 근데 아이디어가 중요해. 아이디어가.
음 우리 이런 대화 한 십 년 전에도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둘이 웃고 말았다.
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어두운 표정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것이 가족사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은 나의 생각. 친구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큰 키에 루시 리우의 얼굴을 닮은 생김이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단정적인 말투는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일 때도 있다. 본인의 권리를 침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목소리를 높여 문제 제기한다. 귀찮다는 이유로 그만둘 일도 없을 것만 같다.
여행을 하게 되면 서로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다. '알게' 되지 '이해'하게 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여행 가면 서로 싸우는 거겠죠?) 밥 먹고 차 마시면서 하지 못했던 발견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24시간이 넘는 시간을, 말 그대로 같이 ‘생활’하는 것이므로 미처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것들도 행동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대화를 나눌 때보다 더 극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관성의 법칙에 따라서 본인의 성향은 강화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주변인들도 그렇다. 사람인 이상, 피해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을 ‘완고하다’고 표현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친구와 내가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을 더 뚜렷이 인지하게 되었다. 싸웠냐고? No! 우리는 싸우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알게 된다.
아 맞지 않는구나.
당연한 말이지만 정치 성향, 갈린다. 종교도 다르다. 친구는 상당히 독실하다. ‘절’도 가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이런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나라 구경거리의 절반이 날아가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린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상당히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글쎄, 그것 역시 사랑이라는데 어쩌겠냐는 생각이고 친구는 상당한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꾸만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는 현재의 삶을 좋아하는 반면, 친구는 오래 살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오, 이런.) 더 좋은 내세가 있다는 것이다. 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가르쳐서 그런지 보안에 극도로 민감하다.
친구야 모바일 뱅킹은 하니?
라는 나의 물음에 다행히도 그건 한다고 한다. (한국에 오면 유심도 하지 않아 연락을 주고받는 입장에서는 너무 불편한데 역시 그것도 보안 때문에 안 하는 것인가?)
나? 나로 말하자면 크게 위험해 보이지 않으면 그냥 하는데, 이것 역시 아주 위험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스팸에 시달리는 이유도 이런 나의 느슨함에서 연유하는 지도.
친구는 몸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약을 하나 고를 때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뭐 하나에 꽂히면 완벽주의자랄까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나는 여기서도 상당히 느슨하다. 적다 보니 나는 상당히 대충대충 사는 인간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친구를 싫어하나? 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친구를 사랑한다. 이 모든 다른 점과 이해할 수 없는 점들 투성이지만, 그런가? 그냥 그런가 보다고 넘어간다.
왜?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는 가족도 백 프로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단 말인가? 이해 안 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거다. 그냥 우리는 ‘다를’ 뿐이다.
그래서 이 그림을 봤을 때 나는 그 ‘다름’에 관심이 갔다. 옷을 입고 식사를 하는 사람과 옷을 벗고 식사를 하는 사람. 물론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마네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내가 받은 느낌과는 다른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벌건 대낮에 피크닉을 나온 두 쌍의 남녀. 분명히 일상에서 벗어나 즐거운 한 때를 즐기기 위해서 그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피크닉을 준비했을 것이다. 내가 여행을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했던 것처럼. 가서 자연을 벗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눠야지. 도시의 저질 공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상쾌한 바람이 우리를 감싸겠지.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숲에 들어섰다.
저기, 저기가 좋겠다.
뒤로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나무가 우거져 그늘이 지니 엄청 시원할 것 같다. 그렇게 일행은 자리를 잡고 빵이며 과일을 꺼내놓는다. 그런데, 그런데 일행 중 한 명이 옷을 훌떡 벗는 게 아닌가? 아니 무슨 이런 ‘무경우’가 다 있지?(중산층의 위선이 고발당한 것 같은 당혹감은 잠시 접어두자.)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친구 커플과 같이 피크닉을 갔는데 다행히 숲 속에는 우리들만 있다. 갑자기 친구 커플이 그럼 한번 식사를 시작해볼까요? 하면서 옷을 훌렁 벗는다면? 일단 같이 간 나의 파트너의 얼굴을 살피겠지. 그들이 나의 의향을 물었다면(제가 식사를 '네이키드'로 해도 될까요?) 나는 될 수 있으면 안 그랬으면 하지만 옷을 벗지 않으면 음식이 들어갈 것 같지 않다면 할 수 없지요.라고 답했을 것 같다.
지금 봐도 놀라운 그림인데 당시 세간에 이 그림이 불러왔을 충격은 그야말로 유명인의 스캔들만큼이나 쇼킹하고 강력한 '소문' 엔진을 달고 일파만파 퍼져나가지 않았을까.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충격을 주며 사람들의 사고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 역시 뛰어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마주하고 친구와 나는 세 끼를 함께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