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골콩드)-르네 마그리트, 1953년
창 밖으로는 촉촉하게 봄비가 내리고 있다. 비는 항상 계절을 짙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봄비가 내리면 움이 트고 여름 비가 내리면 신록의 그 푸름이 더 짙어진다.
가을비가 내리면 길바닥을 뒹구는 낙엽이 많아지고 겨울비가 내리면 날은 더 쌀쌀해진다.
물론 지금은 봄. 봄비는 기온을 올리고 땅을 보드랍게 어루만지는 온화한 측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비’라는 것은 멜랑꼴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유가 뭘까?
기압골의 영향으로 기분이 down 되는 걸까?
해가 나지 않아서 세로토닌 분비가 영향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해가 반짝이는 날도 좋아하지만 과묵한 친구처럼 구름이 잔뜩 낀 날도, 비가 내리는 날도 못 견디게 좋아한다. 해가 쨍한 날은 뭔가 활동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관심이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한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은 다르다.
확실히 관심이 외부보다는 내부로 향한다. ‘생각’하게 된다.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보통 생각은 나를 '침잠'으로 이끈다. 차분해지고 점점 깊숙이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은 더 외롭고 멜랑꼴리 해지는 지도 모른다.
자연에게 ‘비’라는 존재는 계절 색을 짙게 해주는 존재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비’라는 존재는 나를 침잠하게 만드는 촉매제다.
나에게 자꾸 집중하다 보면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으나) 고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외로움을 타지 않으려고 ‘비’와 연결된 좋은 경험을 떠올린다.
대학로에서 억수로 소나기가 퍼붓던 날, 어느 가게 처마 밑에서 친구에게 문자 하면서 비를 긋던 기억,
런던에서 비가 흩뿌리던 날 우산 없이 Londoner처럼 어깨를 웅숭그리고 종종걸음 치던 일,
리장 노천카페에서 돌길과 물길에 빗방울이 튀던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일……
그리고 그 숱한 ‘비’와 관련된 기억 중에서 가장 좋은 기억을 되살려
이 서울이 바로 그 도시라고 상상하면서 하루를 보내곤 한다.
그래서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를 봤을 때 '와락' 화가를 껴안고 싶을 정도의 동질감을 느꼈다.
‘르네, 당신도 역시!’라는 것이 나의 강렬한 감상이었다. 내 멋대로의 동질감일 수도 있겠으나 그림이 좋은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감상자가 스스로 새롭게 맘대로 해석하고 좋아할 수 있다는 점.
그림을 보면 일단 시선을 멈출 수밖에 없다.
하늘에서 비가, 아니 사람이 주룩주룩 내려오기 때문이다.
중절모에 레인코트를 입은 신사가 우산을 받치지도 않고 후두두둑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그림의 제목은 ‘겨울비’. 그럼 더 이상하다. ‘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이렇게 사람이 대신 그려져 있다니.
이 생경한 이질감은 커다란 주목도를 낳는다. 충격을 준다.
르네 마그리트 작품의 기저를 도도히 흐르는 ‘데페이즈망’이다.
미술대사전에 따르면 데페이즈망이란 ‘추방하는 것’이란 뜻으로 초현실주의에서 쓰이는 말로, 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하여 이상한 관계에 두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물건이 있는 표현을 의미하며 그 결과 합리적인 의식을 초월한 세계가 전개된다고 한다.
겨울비가 딱 그렇다.
크리에이티브란 이제껏 만난 적이 없는 사물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라던 이해선 님의 말도 떠오른다.
관성에서 벗어난 사물들의 만남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마치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대단하다.
르네 마그리트는 데페이즈망의 대가였다. 그의 작품들이 후대의 영화(메트릭스, 하울의 움직이는 성)나 많은 음악 앨범 재킷에 모티브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의 창의력이 얼마나 후대에 뿌리 깊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나는 예술가도 아니고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인이긴 하지만 내가 그의 겨울비에 깊이 공감한 것은 결국 ‘우리는 모두 그렇게 객체’라는 사실, 그 잔인한 진실을 내게 왜곡 없이 보여줬기 때문이다.(자기 합리화라고요? 네 -_-; )
비는 합쳐지지 않는다. 비는 항상 한 줄기씩 한 줄기씩 내린다.
바람이 불면 모두 한 방향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합쳐지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로구나. 이 그림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 사실을 깨닫는다.
다양한 방향을 보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어도, 그림 속의 사람들은 하나의 객체로서만 존재한다.
공감이나 교감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관심은 부재하다. 모두 죽음이라는 한 방향을 향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만이 어쩌면 우리 인간의 공통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면 난데없는 한기를 느끼기도 한다.
이토록 철저하게 우리 인간의, 사회의, 본질을 짚어낸 사람이 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어도 교감이나 동감을 이뤄낸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때때로 결혼해서 더 외롭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옆에 있어도 절대 손을 내밀지 않고 상호교감이 없다면, 커플이긴 하지만 상대가 부도체 같은 사람이라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영혼의 짝을 만나길 바라며 희망고문을 하고 있는 싱글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누가 더 힘들다고 말하기 어렵겠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상당히 경직된 ‘성장’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뭔가 일을,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듯이 중절모에 슈트를 한껏 갖춰 입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양복 재단사였던 것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지. (르네 스스로도 그런 차림을 즐겼다고 하는데 역시 성장기의 영향은 중요한가 싶은 생각도 들고.) 정색을 하고 양복을 갖춰 입고 있는 그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정색을 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우습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술가 중에는 유독 천재가 많은데 그 역시 천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상당히 장난꾸러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상상해본다.
낯선 것을 좋아하고 새롭게 해석하기를 즐기고 ‘생각’을 표현하려고 했던 남자.
어떤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그렸던 사람.
그의 생각은 그래서 후대의 팝아트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 겨울비였을까?
왜 봄비가 아니었을까?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전술했듯이 모든 비는 계절을 깊어지게 하면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낸다.
형이하학적인 변화다.
봄비는 움을 트게 하고 여름 비는 잎의 성장을 촉진하며 가을비는 단풍의 색을 짙게 한다.
하지만 겨울비는 그런 구체적인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다.
그저 더더욱 뼈에 사무칠 정도의 ‘추위’를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고독을 표현하는 데에 겨울비 외의 다른 비는 고려할 수 없지 않았을까.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저 빗줄기 하나하나가 다 그냥 우리라고, 서로 다른 객체일 뿐이라고, 그러니 고독은 그저 숙명일 뿐이니 대지가 내리는 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나도 그냥 그렇게 고독을 흘러 보내보자고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