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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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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수 Jan 02. 2024

제자의 장례식엘 가다니요

 때는 2018년이었다.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전역한 12월 9일. 그다음 날 나는 우리 학교 3학년 3반의 담임교사로 복직했다. 아직은 짧은 머리, 군인 티가 나는 말투와 행동. 누군가 보기엔 퍽이나 어색하고 풋풋했을 거다.

 스무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이 내 앞에 앉아있었다. 처음 맡아본 3학년은 어찌나 조그맣던지. 복직 첫날 다소 긴장한 표정들로 재잘대던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 선명하다. 전역 바로 다음 날이었던 복직일. 내가 하는 말에 '예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 자유스런 초등학교의 분위기에 열심히도 적응하려 애쓴 한 명의 초보 교사였으며 초보 사회인이었다.




 내 복직일 전까지 3학년 3반을 맡으셨던 기간제 선생님께 인수인계를 받는 날이었다. 군생활 마지막 휴가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실의 전반적인 분위기, 교과 진도, 성적 처리 현황 같은 것들을 집중해서 듣고 메모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성민이는 건강이 좋지 않아 심장박동기를 차고 생활하는 아이예요. 학교생활에 불편함은 거의 없지만 숨이 차는 행동은 조심해야 해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 말을 듣고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사실 그 시절 내 마음이라는 자체가 조금 안일했다.

'벌써 12월 중순이니 이삼주 남짓만 어찌 보내면 겨울방학이구나. 올해는 그냥저냥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내년부터 진짜라는 느낌으로 열심히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과의 첫 일주일을 정신없게도 보냈다. 이름과 얼굴을 외우랴, 뒤늦은 복직으로 교과 내용을 급히 연구하랴, 학부모에게 인사하랴 여유 부릴 새가 없었다. 처음 해보는 연말 성적처리는 정말이지 복잡했다. 게다가 아이들은 얼마나 에너지가 넘치던지. 일주일 전까지 얼굴 맞댄 20대 초반의 군인들보다 훨씬 더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적응해 가던 교직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사연 덕인지 성민이는 첫날부터 눈에 잘 띄었다. 아마 이름과  얼굴을 가장 먼저 외웠을 거다. 몸이 아프다던 성민이는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전형적인 개구쟁이에 장난꾸러기. 덩치는 또래들보다 크고 통통해서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띄는 존재감 있는 아이였다. 신이 날 때는 흥을 주체하지 못해 방방 뛰는가 하면 수업시간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곤 하는, 전형적으로 선생님에게 자주 꾸중 들을 타입이었다. 아마 그 첫 일주일간도 나한테 몇 번이고 꾸중을 들었을 거다. 군인 티가 덜 벗겨진 2018년도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엄하지 않았던가, 회상한다.



 사건은 첫 주를 정신없이 끝내고 난 주말에 일어났다. 대구 본가에 내려가 휴식을 만끽하던 중이었던 일요일 오후였다. 두세 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3-3김성민어머니'였다. 주말에 웬 전화인가 싶었지만 이내 전화를 받았다. 별생각 없이 받았던 수화기의 저편에서는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주말에 죄송합니다. 성민이가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멍-. 나는 말 그대로 넋을 잃고 말았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도 모른 채. 정적이 흐르는 몇 초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처음 겪는 상황에 대한 당황, 위로의 말씀을 건네야 한다는 마음, 믿기지 않는 제자의 죽음 같은 것들이 뒤섞여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입이 떨어지질 않던 그 통화에서 내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었을까. 아마 흔한 위로의 한마디조차 더듬더듬 헤매며 건네지 않았을지. 그때 처음 느껴진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미숙함이었다. 담임교사로서도 한 청년으로서도 아직 어리기만 한 자신을 마주한 것 같아서.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나는 너무나 작은 물고기 한 마리구나. 자책했던 것도 같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리라. 꿈결 같은 전화를 끝내고선 당장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께 전화드려 말씀드렸다. 당시 교감, 교장선생님께서도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셨다. 다음 날 함께 장례식에 가보자고, 학교에서 진행되어야 할 장례 절차들을 알아보겠노라고 말씀하셨다.


 보고를 끝내고는 어찌어찌 근무 지역으로 돌아와 저녁이 되었다. 그때는 방에 침대도 없던 때라,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쉬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별로 없다. 슬픈 영화를 봐도 어지간해선 잘 울지 않는다. 슬픔에 깊이 공감해도 이상하게 눈물 잘 나지 않음이 신기하기도 했다. 성장기를 보내며 나도 모르는 새 울음을 참도록 훈련되어 버린 것인지, 여하튼 그랬다.

 그렇게 넋 놓고 있는 와중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 아닌가. 나도 내 마음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 본 아이인데. 이렇게 울 일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한참 동안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그렇게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엔 정말이지 너무나 슬펐다. 밝고 씩씩한 아이를 너무 모질게 꾸중한 것이 아니었는지, 나 하나 편하자고 엄하게 대한 것은 아닌지, 수업 시간 던졌던 실없는 농담에 그냥 같이 웃어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닌지, 하루하루가 선물이었을 그 아이에게 왜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는지. 고작 일주일의 기억들에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고자 열심히 걷고 달려 마주한 첫 제자들. 그중 한 명을 먼저 떠나보내게 됨이, 게다가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나보다 어린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나 무겁게 다가올 줄은.

 답답한 마음 나눌 만한 사람 생각나질 않아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내 말을 다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제자 한 명 조금 일찍 하늘나라로 이사 갔다고 생각하렴. 우리 모두 언젠간 하늘나라로 이사 갈 텐데 여기서 부끄럼 없이 살자."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반성을 했는지 모른다.



 두려워하던 다음 날이 되었다. 성민이의 빈 책상에는 꽃 한 송이 올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동해 눈이 동그랬다. 아침 자습 시간 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연습했던 말을 꺼내려 아이들의 주의를 집중시켜 본다.


 "얘들아."

정적.

 "얘들아, 성민이가."

정적.

 선생님이 앞에서 뜸을 들이니 아이들은 무언가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아이들 앞에서 결코 울지 않겠노라 다짐했기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이야기했다. 그 목소리 떨리던 것은 어찌할 방법 없었지만.


 "얘들아, 성민이가 심장이 아팠던 것 알고 있지? 지난 주말에 갑자기 더 아파져서 우리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어. 조금 이따 성민이를 추모하고 기억해 주려고 전교생이 성민이 사진과 함께 운동장을 걸을 거야."



 아이들 표정이 어땠는지,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작 내 마음 추스르는 데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추모를 위해 전교생이 운동장을 걸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이었다.


 방과 후에는 교장, 교감선생님과 함께 성민이 장례식에 갔다. 제자의 장례식엘 가다니. 예상이라고는 전혀 못 해본 상황이었다. 한 부모 가정이었던 성민이의 장례식에는 조문객도 많지 않았다.

 전화로만 이야기를 나누어 본 성민이의 어머님과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게 되었다. 울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셨다. 처음 뵙는다는 인사를 장례식장에서 나누는 기분이란, 쓰이던 의미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해야 할지. 자녀상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해야 할까. 아이를 떠나보내 얼마나 슬프십니까, 해야 할까. 도저히 정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꾸벅, 몸짓으로밖에 마음을 전할 수 없었던 어린 청년이었다.


 성민이 어머님께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특별한 징후는 없었는데 주말에 갑자기 성민이의 상태가 악화되어 급히 서울 병원에 갔었다고. 그러다 손 쓸 새도 없이 떠나고 말았노라고. 그 슬픈 이야기를 뱉어내시는 말투의 담담함이 되레 찡했다.

 또 성민이가 젊은 남자 선생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아주 기뻐했다고도 말씀해 주셨다. 새로운 선생님과 일주일을 보내며 학교가 너무 재미있다고,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그런 칭찬을 들을 만큼 아이를 사랑해 준 것 같지 않은데. 부끄러웠다.



 아이들은 선하다. 다음 날 교실에 출근하니 칠판에 남자아이 얼굴이 그려져 있고 주변에 삐뚠 글씨로 이런저런 문구들이 적혀있다.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


 '그동안 우리에게 있어주어 고마워. 꼭 다시 만나자.'


 '계속 놀려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성민아 놀려서 기분이 싫었지만 네가 떠나서 슬퍼.'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텐데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다 큰 나보다 작은 아이들이 건넨 위로가 성민이에게 더 올라 닿았을 거다.


 겨울방학 지나 개학을 했던 2월에도 아이들은 친구였던 성민이를 잊지 않았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날,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과의 추억을 남기고 싶어 단체 사진을 찍기로 했다. 책상을 옆으로 물리고 카메라를 세워둔 후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그러다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 성민이 자리 비워두고 사진 찍어요!"


 다른 아이들도 '좋아요, 좋아요!' 신을 낸다. 저들에게는 성민이가 아직까지 교실 속 함께 존재하리라. 그렇게 우리는 성민이의 자리를 비우고서 학급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로부터 만 오 년이 넘게 지났다. 그때 3학년이었던 제자들은 이제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테다. 성민이도 아마 살아있었다면 어엿한 청소년이 되어 사춘기를, 변성기를, 많은 고민을 겪었을 시기였으리라.

 하늘나라는 행복한지. 더 이상 아프지 않은지,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지. 가끔 성민이를 기억한다. 그 자그만 몸뚱이 속 맑디 맑은 영혼. 부디 천국에서는 친구들의 위로와 사랑에 힘입어 매일매일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며 지내고 있기를. 교직을 떠나며 가장 먼저 생각나는 제자, 고작 일주일간 함께했던 나의 제자 성민이를 위해 기도한다.




*학생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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