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을 다녀왔다. 향후 일이 년간은 여행 다닐 엄두를 못 낼 것이니 어쩌면 당분간의 마지막 해외여행이었겠다. 내 여행 스타일은 조금 특이한 편이다. 무계획이 계획인 여행이라 할 수 있을지. 한 동네를 무작정 찾아가서 진득하게 있어 본다. 그곳에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모든 골목 구석구석을 걸어도 본다. 맛집 한두 군데 방문하고 떠나는 일정은 그 동네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충분치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문하려는 식당이나 커피숍도 따로 정해놓지 않는다. '일단 가서 둘러보는' 것인데, 그러다 식사 때가 한참 지나도록 밥을 못 먹은 적도 있다. 그간 여기저기 다니며 소위 '핫플레이스'라는 장소들이 해당 지역의 분위기를 대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시행착오를 거쳐 생겨난 여행 버릇이다.
이번 도쿄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가고 싶은 동네에 일단 가 본다. 목적지가 동네 자체일 수도 있고 방문하고 싶은 가게가 될 수도 있다. 목적지가 가게라면 그곳에 들리는 김에 겸사겸사 동네까지 구경하면 되니 일석이조다.
도쿄를 여행하며 내게 뜻밖의 감동을 준 장소 세 군데를 소개해 볼까 한다.멋진 장소를 방문하고 싶지만 관광객이 붐비는 곳은 피하고 싶다면 참고하시길.
첫 번째 장소는 와카스 해변 공원이다.
여행 중 잠깐 잊고 있었는데, 일본이 섬나라라는 사실이 문득 생각났다.
'도쿄에도 바다가 있겠구나!'
잠시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슬램덩크의 배경이 된 바닷가가 유명했는데, 교통편이 조금 더 멀기도 하고 생소한 곳을 찾아가 보고도 싶어서 지도를 살펴보았다. 도쿄 해변의 튀어나온 부분에 작은 공원이 있었다. 바다가 가장 잘 보일 것 같아 무작정 찾아가 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한 시간 반여 대중교통을 이용했을까, 공원에 도착하게 되었다. 거리는 그정도로 멀지 않았으나 환승해야 하는 버스의 배차간격이 30분이었던 탓에 오래 걸렸다. 버스 시간을 미리 알아보면 효율적인 이동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붕 뜬 시간에 끼니를 해결했으니 개인적으로 되레 좋았다. 가보니 공원이 있는 동네에는 마땅한 식당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와카스 해변 공원 주변은 골프장과 캠핑장이었다. 날이 좋았던 탓에 캠핑장에는 벌써부터 텐트들이 많았다. 버스에서 내려 10여분 정도를 걸으니 바다가 나왔다. 바다의 느낌이 여럿 있지 않나. 우리나라로 치면 쨍한 푸름의 동해, 흙빛 차분한 남해, 초록 투명한 제주 바다같이. 도쿄의 바다는 느낌이 또 새로웠다. 도시와 어울리는 하늘색 바다랄까. 홍콩 도심에서 보았던 바다와 느낌이 비슷했는데, 그보다 조금 더 드넓고 햇살 색에 가까운 하늘색이었다.
거기에다 잔디밭과 야자수 펼쳐진 산책코스까지 있었으니,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꽤나 한참을 걷고 사진 찍으며 기분 좋은 한낮을 보냈다.
두 번째 장소는 '무사시노시-사쿠라즈쓰미' 마을이다.
이곳은 가보고픈 베이글 전문점이 있어서 향하게 되었다. 빵은 그냥저냥 먹을 만한 정도였으나 아무렴 어떠랴, 동네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산책로가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었다. 베이글 가게로 향하는 길에는 자그만 다리 하나를 건너게 되어 있었는데, 이 다리를 낀 풍경은그야말로 일본 정취를 품고 있었다. 마을 이름대로 벚꽃이 피는 계절에 방문한다면 몇 배로 더 아름다울 듯했다.
게다가 주택가가 모인 한적한 골목에서는 대도시 도쿄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느긋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자전거 탄 학생, 붐비지는 않지만 동네 주민들 끊이지 않는 가게. 거기에다 따뜻한 햇살 냄새 만연하니 벌써부터 봄이 온 듯한 기분도 들었다. 여행을 떠나노라면 이런 선물 같은 순간들에 가장 감동받곤 한다.
마지막 장소는 아키하바라 역 근처에 있는 '브리티시 펍'이다.
아키하바라를 방문할 일정은 따로 없었는데, 숙소가 아키하바라에서 한 역 떨어진 아사쿠사바시역이었던 덕에 붕 뜬 시간을 활용하여 방문하게 되었다. 이날은 하루 종일 걸어 다녀 굉장히 피로한 상태였다. 동네를 거닐기 위한 재충전이 필요하여 바로 근처 눈에 띈 '브리티시 펍'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부터 옛 영국 느낌이 물씬 났다. 창문이 나있지 않은 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폐쇄감이 든다기보다는 안락한 느낌이 들었다. 아지트에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진한 나무 색의 인테리어와 각종 소품들도 한몫했던 것 같다.
먼저 좋았던 점은 흡연구역과 금연구역이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비흡연자인 나로서는카페나 술집에서 흡연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일본 여행 중 다소 흠이었다. 때문에 흡연 구역이 층으로 구분되어 있거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는 곳을 선호했는데, 이곳이 그러했다.
여행에 있어 맛있는 음식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이것저것 맛보다 보면 아무래도 평소보다는 훨씬 많이 먹게 된다. 이곳은 그렇게 배부른 상태로 찾기에도 더할 나위 없었다. 지하에 자리 잡은 때문인지 홀 공간이 굉장히 넓어서 음료만 주문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전혀 눈치 보이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재패니즈 위스키를 이곳에서 처음 맛보았다. 언젠가 위스키 애호가 친구에게 일본도 위스키를 잘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버번이나 스카치, 테네시 위스키만 마셔 보았기에 새로운 위스키가 기대되었다. 그리고 기대한 대로 만족스러웠다. 50도라는 도수에도 불구하고 산뜻하고 가벼운 향과 맛이었다. 높은 도수에 온더락으로 마셨는데, 니트로 즐겨도 부담 없었을 것 같았다.
내가 느낀 일련의 경험들이 누군가의 취향은 아닐수 있겠지만, 비슷한 안목을 가진 누군가들에겐 도움이 되는 인사이트를 제공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