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백
인생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이왕이면 꽉 채운 그림보다, 여백이 돋보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이맘때면 햇살과 바람이 여위어가지만,
마음만은 비어진 공간만큼 더 풍성해진다.
지난여름 천둥 번개 소낙비에 씻긴 낙엽.
팔랑팔랑 날아와 발등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손가락 사이에 끼어들고, 옷 벗은 나무가 되어본다.
가을은 점점 바스락거리며 뼈를 보이는데
귀 좋은 생각은 더욱 풍성해진다.
때론 차라리 가을 나무가 되어 보고 싶다.
나목이 된 나무와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드는 국수가락 같은
햇살을 보며 인생이란 액자에 여백을 갈무리한다.
때로는 차라리 ㅡ채희문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떤 것일까
이 무슨 인생 초등학생 같은 의문일까
그러나 어쩌다 그런 날은 문득
수많은 활자의 밭이랑 같은 지면 보다도
어느 절절한 사연의 사랑 편지보다도
그저 하얗게 텅 빈 백지가
마냥 가까이 다가오기도 한다네
한 폭의 그림이나 시편에서
그 여백에 더욱 사로잡힐 때가 있듯
때로는 차라리
이 세상 어느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첫사랑, 그 추억의 아련한 행간 같은
한없이 하이얀 지면 그대로가
더욱 순결한 숨결로 와닿기도 한다네
더욱 가슴에 물결치기도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