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줄어드는 아침잠과 나를 긴장하게 하는 일상 속 스트레스 덕에 오늘은 전보다 약 2시간가량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시간은 새벽 6시 언저리. 부스스한 채 창문을 열어보니 창밖엔 안개가 뿌옇게 내려앉아 시야를 흐리고 있었다. 안개를 보는 순간 떠오른 것은 역시나 무진(霧津). 얼마 전 서울의 어느 중고책방에서 사 온 김승옥 작가의 단편집이 생각났다. 출근까지는 시간도 꽤나 남았겠다, 탁한 머리를 정리하고자 커피 한 잔을 내려들고 책상에 앉아 단편집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 김승옥 무진기행 中 (1964)
책을 읽다 보니 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대화란 것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다. 대화가 오롯이 나 혼자만의 것이라면 내가 대화란 녀석을 내 옆에 꼼짝 없이 앉혀놓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겠지만, 이는 항상 나와 상대방과의 공간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지라 언제든 예측할 수 없게 진행되어버리고 만다.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에 나온 한 구절은 아침 안개의 감성에 젖은 나의 마음에 퍽 와 닿았다.
요즈음 사람들이 점점 대화라는 것을 잃어간다고 한다. 대화를 잃는다기보다는 텍스트 메시지 시대에 익숙해진 터라 유례(類例) 없던 전화 공포증이 생겨날 정도로,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이 상대에게 답변을 줘야만 하는 즉각적인 ‘ON THE SPOT’형 의사소통인 대화는 사람들로부터 점점 외면받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그러한 사람들에 속하는 편이다. 단, 나의 경우는 조건부로. 일할 때는 반드시 신속하게 대화를, 그 외 나의 생각이나 의견을 전달하고 싶은 경우에는 가능하다면 반드시 글로. 일처리는 엄밀히 따지자면 ‘내 것’이 아니기에 신속하게 처리해 버려야 하는 것이므로 조금이라도 빨리 내 어깨의 무게를 덜 수 있는 대화를 선호하는 반면, 나로부터 나오는 생각과 의견은 ‘내 것’이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도, 틀림도 없이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때는 글을 적어 내려간다.
나는 아날로그의 힘을 믿는 편인지라, 종종 손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내는 것이든, 직장 동료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든 나의 마음과 감정을 펜 촉 끝에 꾹꾹 눌러 담아 종이에 옮긴다. 종이에 옮기기 전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 전달할 글의 맥락을 잡고 이를 다시금 손으로 옮겨 담으며 조사를 고치고, 단어를 개정하는 등의 각색을 거쳐 하나의 글로써 내 머릿속의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끄집어내고 엮어내어 마침내 완성시킨다. 말로서 표현하면 30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지만 상대가 조금이라도 명확하고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한 시간, 두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강박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글은 일방적이다. 발송되는 쪽으로부터 수신하는 쪽으로까지 일방적인 흐름만을 취하고 내가 할 말을 상대에게 전달하고 나면 글은 유명을 달리한다. 대화는 그 현장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오고 화답이 오고가는 반면, 작성된 글은 그냥 상대방에게 닿고 거기서 생을 다하고 마는 것이다. 상대는 내가 전하는 나의 생각들을 그저 떠안는 수밖에 없다. 내가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 이후는 상대에게 주도권이 넘어간다.
공공재의 성격을 띠는 대화라는 것의 성격을 회피하기 위해 나는 이런 이기적인 의사소통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에서 오는 예측불가능성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즉시 되돌아오는 상대의 반응과 이에 따라오는 즉각적 반응의 의무. 나 역시 그자리에서 상대방에게 다시금 반응해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스스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껴 불안한 것인지도. 누군가에게 응당 어떠한 말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퍽 사람을 긴장되게 만드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주는 불안감과 나의 생각이 곡해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그리고 나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상대방의 기대에 따른 나의 긴장감으로 인해 역시나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작중 무진의 안개만큼이나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대화의 유동성(流動性)이, 지금의 나에겐 설렘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스럽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