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책을 다 읽었는데도 책을 덮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연수 작가님, 새벽이 밝아오고 있지만, 머릿속인지 마음속인지 무엇인가 묵직한 돌덩이가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무엇인지 실체도 모르겠는 힘에 짓눌려보기는 처음입니다. 그 무거움은 잔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뚜렷하고 아금박스럽습니다. 무엇일까요? 깨뜨리기는커녕 묵직한 것을 하나 더 얹어 놓아 버리는 작가님의 소설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누구에게나 다 그랬겠지만, 코로나 19는 삶의 방향을 엉망진창으로 흩트려 놓았습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닫았고, 마스크로 얼굴, 아니 마음을 가리고 살았습니다. 우울한 포충망에 갇히고 말았었지요. 두려움과 기대감을 버무려가며 세 번이나 예방주사를 맞았지만, 16층의 높이로 쌓아 올린 성벽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근육은 갈가리 찢기는 듯했고, 용광로에 빠진 것처럼 온몸은 끓어올랐습니다. 말을 하지 못했고 입맛을 잃었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해 여름은 ‘불운’이었고, ‘불행’이었습니다.
열흘 정도 앓고 난 후 희미한 시선으로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았습니다. 세상을 다 씻어낼 것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에 기대어 작가님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꽤 무게가 있는 소설을.
독자들과 둘러앉아 낭독회를 하기 위해 썼다고 했죠? 작가님은 사람들이 낮 동안 열심히 일해서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들이 밤을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것. 그런 소설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설 속에 녹아있는 무거움은 작가님이 독자들에게는 전하려는 메시지의 무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들이 깊은 생각에 몰두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 말입니다. 작가님은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서 ‘소설가는 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마르고 젖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작가님이 그 ‘몰라도 되는 세계’를 들춰내 버린 이상, 그것은 이제 우리 앞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독자로서 어느 정도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지는 모르지만, 소설가가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세계를 어떻게 드러내놓는지, 또 드러내놓은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는 저마다의 시선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책을 읽는 이유라는.
나는 단편소설을 참 좋아합니다. 단칼에 잘라낸 예리한 단면. 은유일까, 상징일까. 내 가슴을 쑹덩쑹덩 베어내는 잘 벼려놓은 칼날의 그 슴벅슴벅함 같은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책에 담아 놓은 스무 편의 작품들은 모두 예리한 칼날입니다. 짤막한 단편이었기에 짧은 호흡으로 읽었지만, 정작 거친 숨을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이 끓어올랐던 것이지요. 그것들은 모두 내가 걸어야 하는 삶의 여정으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게 살아가는 방법 말입니다.
작가님, 책에 담긴 스무 편의 소설들은 각자의 색깔을 지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 편을 관통하는 작품은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나요? 인기가 높은 개그맨에서 아내와 사별하고 겪은 공황장애를 극복하면서 유명한 소설가가 된 신기철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깨어나라’라고. ‘깨어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그것을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찾아냈습니다.
코로나 19가 세상을 짓누르고 있던 2020년 2월 어느 늦은 밤, 엄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병원에 도착한 소설가 ‘나’는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소설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작가님은 어머니의 임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한 이야기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이 데이비드 소로와 유방암을 앓고 있던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 이야기 말입니다. 거기에다 소설가 ‘나’의 이야기까지. 물론 독자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작가님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떠올린 질문과 연결 지어 읽을 것입니다. 작가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서 말입니다.
죽는 순간에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소로는 욕망에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을 때 풍요로운 삶을 살았고, 너무나 경이로운 세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치 딱총나무에 물과일이 맺히는 것 같은.
유방암을 앓게 된 철학자 미야노는 인류학자 이소노의 답장을 받고 불운을 자신의 인생이라는 한 줄기 선으로 녹여내기로 마음먹고 나서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장편 소설의 매듭을 짓지 못하던 ‘나’는 질문에 답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지켜보고 돌보는 사람이 되었을 뿐인데 글이 저절로 이어졌고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를 목격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것들을.
이들에게서 공통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내면을 향하는 시선을 가로막는 욕심을 다 걷어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서 말하는 깊고도 완벽한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놀라울 만큼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오롯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이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은 인물들이 지나온 길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가야 할 미래를 말하는 것일까요? 읽는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다가올 시간들 말입니다.
광고전문가 박웅현은 『여덟 단어』에서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여덟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소설에서 말하려고 하는 주제와 결을 같이 한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그중에서 자존自尊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박웅현은 자존을 내면에 들어있는 별을 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존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존은 중심점을 내 안에 두고 나를 존중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내 안에 중심점을 두려면 내 안에 들어있던 것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작가님이 말하는 자신을 돌보라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미야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작가님도 다 보셨지요? 코로나 19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허둥댔는지. 어디든 갈 곳이 마뜩잖았고, 어깨를 겯고 발을 맞추지 못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형편없이 무너졌습니다. 길을 막고 문을 닫았습니다. 모든 것이 불통으로 내달았습니다. 모두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디에고 자존은 없었습니다. 모두를 다 잃게 되었지요.
그때 우리는 왜 『월든』이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을 읽어볼 생각을 못하고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두꺼운 장막을 두르기만 했을까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불운’을 자신의 인생으로 받아들여 녹여내지 못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시작한 낭독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이 낭독회를 위해서 썼던 소설들은 예리한 깨우침이 되어 면면히 흐를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나’에게 베풀었던 마음이 그대로 ‘열무’에게 이어지듯, 40년 후에도 너무나 많은 여름이 저절로 찾아올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작가님, 기억하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시작될 너무나 많은 여름을 맞겠습니다. ‘소로’와 ‘미야노’와 작가님, 그리고 작가님의 소설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