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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by 힘날세상

AI 'Copilot'이 그려준 무진




짙은 안개가 하늘을 덮고 있다. 세상은 뿌옇고 무채색의 하늘은 발밑까지 내려앉았다. 마음은 무너졌고, 혼란스러웠다.


덮여버린, 그래서 자신의 채도를 다 잃어버린 세상의 뒤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감추고 싶은 세상이 있는 걸까. 창문을 열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흐릿하게 감춰진 뒤쪽 세상은 이미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돌아서는 그때, 소설 <무진기행>의 페이지들이 천천히 넘겨졌다.


70년대 말, 막걸리로 얼룩져버린 국문과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고 비틀걸음으로 돌아온 날, 방바닥에 엎드려 허우적대다가 잠에서 깨었던 날 <무진기행>을 처음으로 읽었다. 무진으로 가는 차창 너머로 '윤희중'의 시선으로 묘사되는 안개는 알량한 젊은이의 머릿속을 걷잡을 수 없이 흔들어댔다. 그것은 치기稚氣였다.


'윤희중'과 같은 30대에 다시 <무진기행>을 읽었다. 무진을 덮고 있는 안개는 여전히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윤희중'과 '하인숙'의 내면을 들여다본 듯했으나 나 자신까지 뒤덮어 버린 안개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소설에 매몰되어 버린 것이다.


고희古稀의 목전에서 안개가 낀 날 아침, 무진의 안개는 여전했으나 무진으로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윤희중'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서른셋의 젊은이였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버스의 덜컹거림을 턱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진기행霧津紀行


책을 열기 전에 '무진기행'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기행紀行 의 사전적 의미는 '여행하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진에서 '윤희중'이 느끼고 겪는 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서른셋의 젊은이와 무진의 안개를 헤치고 들어서는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고루하고 침침한 눈으로.


김승옥은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추체험追體驗은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희중'의 행태는 바로 나의 그것이고, '윤희중'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글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야기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것을 보편화라고 할까, 일반화라고 할까. 돈을 들여 책을 사고, 시간을 쏟아 책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작품의 인물이 되어 작가가 숨겨 놓은 메시지를 찾아서 마음 깊이 담아야 한다.



안개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잡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품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해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싸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ㅡ 김승옥, <무진기행> p. 10 ~ 11에서


안개에 실어 놓은 작가의 펀치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무진기행>은 흔한 통속소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안개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무진에 살고 있는 '하인숙'과 무진에 내려간 '윤희중'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려는 바를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우쳤다. 무진을 덮고 있는 안개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멋진 풍경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안개의 본질은 바로 안개 그 자체이다. 무진을 덮고 있는 안개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해쳐 버릴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떼어 놓'는 것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진의 명산물'이다.


안개는 사람의 눈을 가리는 존재이다. 즉, 사람들의 행동을 덮어 버리는 장막이다. 서울에 있는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는 윤희중과 무진에 내려온 윤희중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안개이다. 그는 '무진에서는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무진에서 야누스의 얼굴로 지낼 수 있는 것도 안개라는 가림막이 있기 때문이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는 중학교 음악 선생 '하인숙'의 행동을 낳는다. 졸업 연주회에서는 '나비부인'을 불렀던 그녀가 남자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는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 만난 윤희중과 몸을 섞게 하는 것이다. 정말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짓을 한다. 안개에 가려져 남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진霧津? 무진霧津!



무진이 어디인지 묻는 말에 뇌졸중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김승옥 작가는 “서울, 광주, 부산, 대구, 순천, 원주, 평양”이라고 써 보였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다 무진이 될 수 있다고 한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가가 말하는 무진은 수심이 얕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아침마다 짙은 안개에 덮여 있는 오륙만의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어촌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곳이다.


'윤희중'에게 무진은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 찾는 곳이었고, 더러운 옷차림과 누우런 입술로 골방 안에서 뒹굴던 곳이었다. 깨어 있을 때는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비웃으며 시간이 흘러가던 곳이었으며, 잠들어 있을 때는 악몽이 혹독한 채찍질을 하던 곳이었다. 또한 무진은 제약회사 전무를 기다리며 긴장을 풀어버릴 수밖에 없는, 일탈이 무의식 중에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곳. 안개가 덮여 있어 그런 몸과 마음을 가려주는, 자기 합리화하기에 딱 좋은 공간 같은 곳. 말하자면 사람들 옆에 무시로 펼쳐져 있는 흥등가紅燈街 같은 곳이 아닐까.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

ㅡ 김승옥, <무진기행> p. 12에서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ㅡ 김승옥, <무진기행> p. 24에서



무진에서는 삶의 긴장을 풀어놓아도 되는, 아무 곳이나 퍼질러 앉아있어도 되는 예비군 훈련장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얼룩무늬 군복에 몸을 감추고 자신의 실체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너나 나나 속물이라고 손가락질해도 되는, 자신을 놓아버려도 되는 곳이 무진이다. 그러니까 실재하는 곳이 아닌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무진으로 들어서는 '윤희중'을 이해할 수 있었고, 무진에서 휘청거리는 그를 용납할 수 있었다. 그에게 무진은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곳이기에 서울에서는 점잖은 척 기품 있게 살고 있지만, 좀 무너져도 되는, 우리 모두 은연중에 들어서고 싶은 일시적인 쾌락의 공간이 아닐까.



윤희중 + 하인숙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사랑을 빙자한 그런 것이었다. 적어도 무진에 내려온 '윤희중'이나, 심심하다는 것을 핑계로 내세우며 '유행가'만 부르라고 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노는 음악 선생 '하인숙'은 그랬다.


그들은 시답잖은 욕망에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해쳐 버릴 수가 없'는,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진에서 윤희중은 자신의 욕망대로 흐느적거릴 수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진은 좀 무너져도 되는 예비군 훈련장 같은 시공간이다. 그래서 윤희중은 하인숙을 만나고,. 조금의 애정도 없이 그녀를 품는다. 안개가 덮인 무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진의 안개는 모든 것을 덮어 가려주는 존재이기에 윤희중은 무진에서 무너진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 선생 하인숙은 '어떤 갠 날'과 같은 아리아를 부르지 않는다. 무진에서 그녀는 유행가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그녀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가 지니고 있는 '청승맞음'이 아닌 '좀 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드러내고 있었고, '어떤 갠 날'의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다. 하인숙은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유행가'나 부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만났다. 바다로 뻗은 긴 방죽길을 그들은 구름이 낀 하늘 밑을 나란히 걸었다. 걷다가 손을 잡았다. 손을 잡힌 여자의 손가락은 남자의 손 안에서 꼼지락 거렸고, 서로 고개를 마주 보며 웃음 지었다. 1년 동안 요양하면서 '쓿쓸하다'는 말만 늘어놓았던 집에서 그들은 몸을 섞었다.


서울로 불러만 주면 따라가겠다는 하인숙과 '백이 좋고, 돈이 많은 과부'를 만나 제약회사 전무가 되는데도 '하인숙'이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자기 모습이라서 사랑하고 있다는 '윤희중'.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무진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속물俗物'이라고 생각하는 무진에서 '윤희중'은 '속물俗物'들 틈에서 살고 있는 '하인숙'인들 속물로 보지 않았을까. 잠시 사랑을 느꼈던 것은 그곳이 '긴장을 풀어 버릴 수밖에 없는' 무진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리아 '어떤 갠 날' 대신 '목포의 눈물'이나 불러야 하는, 개구리울음소리 나 들리는,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무진에서는 미쳐버릴 것 같아 대학 동창들이 살고 있는 서울만을 그리고 있던 '하인숙'은 서울에서 내려온 '윤희중'을 따라 서울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희중'의 방에서 나온 그녀는 서울에 가지 않겠다며 '어떤 갠 날'을 불러주겠다고 한다. '희중'에게는 '목포의 눈물'이 아닌 '어떤 갠 날'을 부르고 싶었을까. 그가 그리고 있는 서울과 서울의 생활은 그냥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싶었던 것일까.


Vedi? E venuto!

보이지요 그가 왔어요.

Io non gli scendo incontro. Io no. Mi metto

나는 만나러 가지 않을 거예요. 나는 안 가요.

Là sul ciglio del colle e aspetto, aspetto

나는 언덕에서 기다릴 거예요.

Gran tempo e non mi pesa

얼마든지 오래도록 기다릴 수 있어요.

La lunga attesa.

님을 기다리는 것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ㅡ <어떤 갠 날>의 가사 일부


'하인숙'이 '어떤 갠 날'을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불렀던 부르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에는 '어떤 갠 날'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인숙'이 '희중'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무진기행을 참 많이 읽었다. 어렸을 때부터 읽어오고 있고, 문학은 '동적 구조動的構造'라고 하는데도 아직까지 '인숙'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무진에서 '박 선생'과 살았을까. 또는 '세무서장 조'와 살았을까 혹여라고 서울로 떠나갔을까.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내의 전보는 희중을 일깨운다.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시쳇말로 '현타'가 온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무진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서울로 가야 한다. 제약회사 전무가 되어 근엄하게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ㅡ 김승옥, <무진기행> p. 40 ~ 41에서


희중은 '아내의 전보' 앞에서 마지막 남은 인간성으로 무진을 받아들인다. 그는 무진의 본질적 의미 앞에서 갈등한다. 어쩌면 무진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삶의 단면이었을까. 그래서 희중은 무진을 내버리고 현실로 돌아오라는 '전보'와 오랫동안 다투고 타협한 것일까. 한 번만 무진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약회사 '전무'로 점철되는 현실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본연 한 자태를 회복하겠다는 그의 진심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바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럼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별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 봤다. 또 한 번 읽어 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ㅡ 김승옥, <무진기행> p. 41에서


희중이 쓴 편지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내면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 욕망에 짓눌려 자신과의 약속을 내동댕이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편지를 찢어버리는 '희중'을 이해할 수 있다. 무진에서 '희중'은 자신을 상실한 채로 살았으니까. 얼마든지 무진을 내동댕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전무 자리가 보장되어 있는 서울은 어쩌면 무진보다도 더 자신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야 할 공간이리라. '인숙'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서울은 차라리 무진보다도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무진에서 보낸 시간쯤이야 한 오라기도 남겨두지 않을 만큼 위선적인 공간일 것이다. 그래서 '희중'은 '인숙'에게 쓴 편지를 찢어 버리는 것이다.


그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어쨌든 '희중'도 사람이기 때문이었으리라. 나 또한 그만큼은 아니지만 부끄러움을 느꼈다.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뿐."


1980년인가 김승옥이 말했다는데, <무진기행>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다시 <무진기행>을 읽을 때마다 가슴을 두드릴 것은 분명하다.


2024. 0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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