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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의자와 툇마루

장미숙 작가가 내어놓는

by 힘날세상


장미숙 작가의 두 번째 수필집 ‘의자, 이야기를 품다’를 받았다. 첫 수필집 ‘고추밭 연가’에서 받았던 감동이 그대로 남아 있는 까닭에 두 번째 수필집 ‘의자, 이야기를 품다’도 아껴가며 읽을 것이다. ‘의자, 이야기를 품다’도 단숨에 읽어버리기에는 삶의 근원에서부터 발원하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사람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 다는 장미숙 작가의 친필 사인이 되어 있는 책을 양지바른 창가에 놓아두고 읽고 또 읽을 것이다.


정말 우연히 장미숙 작가를 알게 되었다. 40년 가까이 지켜왔던 교단을 내려오자마자 중국에서 발생했던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고 인간들의 삶을 뒤바꿔버리면서 나는 모든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다낭, 대만 동부, 라오스, 태국으로 이어지는 자유여행의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무너져내리는 마음의 속을 무엇이든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채 허탈감인지 상실감인지 견딜 수 없는 감정에 짓눌려 버렸다. 서가(書架)에 꽂혀 있는 책을 되는대로 꺼내서 넘겨대다가 피천득 님의 ‘수필’이라는 수필을 읽게 되었다.



수필은 청자연적이요,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피천득, ‘수필’에서



입가에 막 수염발이 잡히기 시작하던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노트에 깨알같이 베껴 쓰던 생각이 나면서 느닷없이 수필에 빠져들게 되었다. 수필을 읽어보고, 써보자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뒤지며 수필이 담겨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장미숙 작가의 블로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고추밭 연가’를 읽게 되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추밭 연가’라는 작품을 읽다가 문득 피천득 님이 내린 수필의 정의와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품을 읽어갈수록 그러한 생각의 두께는 점점 더 두꺼워져 갔다.


장미숙 작가의 작품은 청자연적이 아니었다. 난(蘭), 학(鶴),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의 수필은 투박한 질그릇이었고, 잡초였으며 흔하디 흔한 들새였다. 무거운 삶에 지친, 허리통 굵은 아낙네였다. 칼바람이 불어오는 산길이었고, 오르막이 심하게 이어지는 자갈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 모두에는 꿋꿋하게 피어오르는 생명력이 있다. 그 생명력은 세심하고 진솔하면서도 깊이 있는 관찰에서 끄집어내는 삶의 의미에서 근간한다. ‘삶의 바퀴는 닳을 대로 닳아 너덜거리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한 희망이 있기에 몸을 일으켜 세운다’는 장미숙 작가. 그는 작품 앞에서 언제나 발가벗는다. 자신의 아픔을 조금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아픔 속에 짓눌려 있던 가늘고 희미한 희망의 은유들을 한 올 한 올 뽑아 올린다. 그리고 그것들은 굵고 굵은 밧줄이 되어 독자를 붙들어 맨다. 그녀의 작품 앞에 다가온 독자들이 돌아서지 못하게 되는 강력한 흡인력이 되는 것이다.


‘의자, 이야기를 품다’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 ‘의자’ 하나가 보인다. 그것은 화려하고 위엄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볼품없이 찌그러진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이에게는 편안하고 안락한 의자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머릿속에서만 소유할 뿐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하기도 하는 그림의 떡 같은 의자이기도 하다. 앉아 있는 자는 그 편안함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앉지 못하는 자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이 의자이다. 작가는 의자를 갖지 못하는 사람의 아픔을 말하고 있다. 폐지를 줍는 노인, 건설자재 회사의 인부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일하는 작가. 그들은 자신의 의자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고, 의자에 ‘앉을 시간도 없’기에 ‘온종일 서서 두 다리로 삶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 내 의자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의자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의자는 삶에 짓눌린 몸을 위한 휴식처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을 살찌울 수 있는 사회적 존재감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어딘가에 있을 내 의자를 생각’하며 ‘무너진 다리를 곧추 세우’는 것이다.


인간 소외일까, 관계 단절일까에 골몰하다가 문득 프랑스 희곡작가 외젠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이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외롭게 살아가는 노부부가 무엇인가 중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고 자신들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의자를 내놓는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무대에는 빈 의자만 가득 차게 된다는 작품이다. 누군가와 소통하고 관계를 맺어보려고 하지만 이어지지 않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인 것인가. 이오네스코는 널따란 무대에 의자를 가득 채우면서 인간관계의 단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내어 놓지만 앉아줄 사람이 없는 노부부의 삶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많이 있지만 나의 의자가 아니기에, 내가 준비한 의자가 아닌 까닭에 앉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삶과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연극이 끝났을 때, ‘이오네스코는 그 많은 의자들을, 그 절망과 무서움으로 가득 찼을 의자들을 어떻게 치워냈을까’하는 중압감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기억이 있다. 부조리(不條理) 연극의 상징처럼 여겼던 이오네스코는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관객들에게 맡겨 두었다. 그러나 장미숙 작가는 참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다. ‘툇마루’다.



툇마루는 그렇게 세상을 품어 안고 동그란 우주를 향해 열려 있었다. 모든 게 부족하고 가난했던 시절조차도 행복한 기억으로 승화시켜 버리는 힘을 가진 툇마루는 철학적이고 사색적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어우렁더우렁 정이 흐르고 동글동글 삶이 익어가던 곳이었기에 서로의 어깨에 기대 슬픔도 기쁨도 나눌 수 있었다. 찰랑찰랑 맑은 물 한 바가지로 나그네의 지친 마음을 풀어주던 곳, 내게 툇마루는 그런 곳이었다.

-장미숙, ‘툇마루’에서



툇마루는 앉을 ‘의자’가 없는 우리들이 ‘무너진 다리를 곧추 세’울 수 있는 삶의 뿌리인 것이다. ‘토방을 슬금슬금 기어올라’온 햇살로 인해 ‘적당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엄마가 없는 날도 엄마의 품처럼 포근’했다. ‘툇마루’는 수필집 ‘의자, 이야기를 품다’ 전편(全篇)을 아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굳건한 반석이다. 서정주 시인은 그런 툇마루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친다고 노래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툇마루는 있어야 한다. 의자를 갖지 못해 찢기고 무너져 삐거덕거리고, 덜커덕거리는 인생의 수레바퀴에 온새미로 칠할 윤활유와 같은 툇마루 하나쯤은 의식의 심층부에 고이고이 담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장미숙 작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의자, 이야기를 품다’와 ‘ 툇마루’ 두 편의 작품을 읽고 며칠째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청자연적이 아닌 질그릇 같은 진솔한 삶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는 작가는 자신의 아픔을 담고 있는 단어 하나, 한 줄의 문장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성찰과 희망의 베를 짜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작가의 베틀에서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을 읽기 위해서는 나의 심사(心思)부터 닦아내고 나의 삶의 방정식을 먼저 가다듬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느 즈음에서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툇마루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내놓지 않을 것이다. 툇마루는 바꾸거나 다듬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 고이고이 간직해야 할 우리의 발디딤이기 때문이다. 장미숙 작가는 그런 툇마루와 같은 작가이다.



마음속에 툇마루를 하나 들여놓고 산다는 것, 현실에 지쳐 꿈조차 시들어가는 영혼을 깨울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조급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욕심이 지나쳐 마음이 사나워질 때도 마음속의 툇마루는 내게 속삭인다. 버려야 채울 수 있는 것이라고, 먼 곳의 신기루가 아닌, 가까운 곳에 있는 소소한 행복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장미숙, ‘툇마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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