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직장동료의 꾐(?)에 빠져 5월에 달리기에 입문했다. 정말 마약처럼 빠져들었다.
아침에는 천변으로 뛰고, 밤에는 달빛을 머금은 들판에서 달렸다. 두 달 만에 하프를 뛰어버렸다. 5km, 10km 대회는 건너뛰고.
마라톤 클럽을 만들고, 그 여세로 10월에는 춘천까지 가서 풀코스를 달렸다. 3시간 57분.
그게 내 최고 기록이다.
ㅡ아프리카 선수들 판이네.
ㅡ배가 고파야 달리는 건데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우리나라 최고기록은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이봉주가 세운 2시간 7분 20초이다. 오늘 달리고 있는 한국선수는 2시간 10분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ㅡ달리는 폼은 깔끔하네.
ㅡ그럼 프로선수가 오죽하겠어.
ㅡ달리고 싶다.
ㅡ나도.
ㅡ그때 생각나. 2002년 서울마라톤대회.
ㅡ어찌 잊을 수 있겠어. 우리가 손잡고 같이 달린 풀코스인데.
우리는 서서히 마라톤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2024 JTBC 서울마라톤에 나서는 아들이 준비한 마음가짐
ㅡ아들은 잘 달리고 있겠지?
ㅡ연습을 못해서 sub4가 목표라고 했으니 fun run 하고 있지 않겠어.
마라톤 중계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러너들의 표정이다. 특히 입이 벌어지는지, 팔이 내려가는지. 그걸로 러너들이 지쳤는지를 판단해 볼 수 있다.
30km 지점을 지나면서 페이스메이커들이 빠지고 나면서부터 진짜 마라톤이 펼쳐진다. 지금까지는 모두 페이스메이커 뒤를 따라가는 아주 수동적인 경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이 주도하는 마라톤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옆에서 달리는 선수들의 숨소리로 경쟁자들의 컨디션과 체력을 판단하고 어느 시점에서 스퍼트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호흡이나 체력도 아주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선수들은 평소에 달리기만 연습하는 게 아니다. 30km 이후의 레이스 전략을 짜고 거기에 맞춰 훈련을 한다. 현대 마라톤은 스피드가 우선이기 때문에 모두 후반 스피드를 끌어올리는데 훈련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두 명의 선수가어깨를 나란히하고 달린다. 작년 대회 우승자 발루 이후니 데르셰
(에티오피아)와 길버트 케벳 (케냐) 선수다. 데르셰 선수는 페이스메이커들이 빠지자마자 곧바로 스퍼트 하기 시작했다. 데르셰 선수는 30km까지 달리면서 최대로 힘을 비축했고 그 자신감으로 달려 나간 것이다. 예전에는 35km 지점에서 스퍼트를 했었는데 갈수록 스퍼트 지점이 빨라지고 있다. 마라톤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데르셰 선수는 고독한 경기를 펼쳤고 2시간 7분 37초로 2위 선수를 29초 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혼자 달리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고 온 가족을 생각했을까. 흔히 마라톤을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그것은 힘든 육체를 자신의 정신력으로 버텨내야 하기 때문이다.
ㅡ당신은 풀코스 달리면서 무슨 생각하고 뛰었어?
데르셰 선수의 조금씩 일그러지는 얼굴을 지켜보던 아내가 묻는다.
ㅡ내가 가장 힘들고 슬펐을 때를 생각하고 달리는데, 마라톤의 고통을 어느 정도 잊을 수 있더라고.
풀코스를 15회 뛰었는데 항상 25km 지점이 1차 마의 지점이었다. 숨은 가쁘지 않으나 다리가 무거웠다. 그러나 이 지점의 고통은 물을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어느 정도 쉬면 넘길 수 있었다. 다시 힘을 내어 달리면 그런대로 달릴 수 있다. 문제는 37km 지점에서 부딪히는 극심한 고통이다. 숨도 많이 거칠어져 입은 잔뜩 벌어지고, 다리는 내 다리가 아니다. 근육이 경직되어 발을 디디기 힘들 때도 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TV화면으로 보면 선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것 같지만 그들은 무아지경으로 달리는 것이다. 그들이 훈련하는 것은 정신력이 대부분이다. 간혹 결승선을 통과하고 쓰러져버리는 선수들이 있는데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버티고 있던 정신력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주로를 달리는 선수들을 보면서 나 또한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음을 가다듬어 보았다. 20년 전 힘차게 달리던 그때의 레이스를 떠올려보았다.
아들의 수능 고득점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힘들게 공부하는 아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로 중앙마라톤(현 JTBC 서울마라톤) 풀코스를 달렸던 그날의 주로를 떠올렸다. 오늘 아들의 예상시간은 sub 4이다. 20년 전에 내가 달렸던 기록과 비슷하다.
지금 시각은 10시 20분. 출발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났으니 20km 지점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즐겁게 달리고 있을 것이다.
ㅡ35km까지는 즐겁게 달릴 수 있을 거고, 그 이후가 문제예요.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아들은 3시간 28분의 풀코스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참 연습을 할 때의 일이다. 코로나로 마라톤 경기가 열리지 않고 속해 있던 러닝크루의 활동도 막히면서 달리기를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올해 3학년 담임을 하게 되고 힘든 수험생활을 하는 학생들과 약속을 했다고 한다.
ㅡ너희들이 힘든 만큼 샘도 힘들게 달리겠다. 수능 전까지 1.000km를 달릴 것이고 11월 3일 JTBC 마라톤에서 4시간 이내의 기록으로 달릴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공부해야 한다.
아들과 학생들은 의기투합했고 마라톤에 참여하는 선생님의 번호판에 달 사진과 작은 깃발을 준비해 주었다. 번호판 뒷면에 자기 반 학생들의 이름과 지망대학을 써넣고 아이들이 만들어준 깃발을 곱게 접어 허리춤에 차고 주로에 나섰다.
자기들의 수능 고득점을 기원하기 위에 주로에 들어선 선생님을 응원하기 위해 학생들이 만든 깃발
아들이 35km을 지날 거라고 예상되는 시각에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눈을 감고 마음으로 달렸다. 35km 지점의 고통을 마음으로 느꼈다.
그 거친 호흡을, 그 견딜 수 없는 허벅지의 고통을 생각했다. 주로에 주저앉아 있는 주자들을, 그 주자들을 응원하는 그 많은 응원요정들이 생생하게 그려봤다.
잠실대교를 건너면 아들이 활동하던 크루의 주무대인 석촌호수가 있고, 근무하고 있는 학교가 있고, 결승선은 늘 달리던 올림픽공원이다. 이것은 큰 힘이다. 흔히 마지막
2km는 주로에 늘어서서 응원하는 소리로 달리는 것이다.
ㅡ3시간 54분 41초에 마쳤어요.
ㅡ잘했다, 다리는 괜찮고?
ㅡ37km 지점에서 쥐가 나서 마지막에 힘들었는데, 반 아이들 몇이 응원해 줘서 아이들과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ㅡ그래 애썼다. 냉탕에 들어가서 잘 풀어주고 잘 쉬어.
괜히 눈물이 났다. 20년 전에 내가 아들, 딸이 사인해 준 번호표를 달고 힘들게 달렸던 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달리고 싶다. 10월 20일에 5km를 달리면서 깨어난 마라톤 세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들과 동반주하면 내년에는 하프 마라톤도 달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