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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Dec 02. 2024

3화 폭설 2

그 사소한 것들이

그 무지막지한 폭설이 뚝뚝 부러뜨려 놓은 곧은 나무들



폭설, 세상을 덮은 폭설의 진면목을 보았다. 느닷없이 세상을 덮어버린 그 무지막지하고 포악한 폭설의 횡포를.


사람들이 어울렁더울렁 살아가는 도회지까지 바짝 내려와 낮은 자락을 펼치고 있는 뒷산을 걸었다. 발목, 아니 종아리까지 빠지는 눈이 점령한 산길을 비틀걸음으로 걸었다.



첫눈이 내릴 거라고, 11월 눈 치고는 조금은 많이 내릴 거라고 기상대에서 발표했을 때, 가루눈이 하늘을 떠도는 것을 보고 젊은이들은 연인들의 손을 잡고 밀어를 섞어가며 밤을 걷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토끼몰이를 하던 어린 시절을 돌이키며 낭만을 끌어올려본 노인들도 있었으리라. 어쨌든 눈 덮인 풍광은 메마른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기에  설경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당겨보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후 들어서 가루눈은 함박눈으로 변했고, 온누리를 덮은 눈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직 하나 흰빛이었다. 너나없이 모두가 똑같은 흰옷을 입었으니, 볼썽사나운 것들을 다 가려놓았으니, 차별 없는 세상이고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냐고 크게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런 세상이 왔다고 생각할 만큼 세상은 순백의 옷을 입고 있었고, 눈부시게 빛나는 설국에 들어서는 것처럼 아름다운 세상으로  보였다.


아침이 되었을 때 세상은 '순백'이니, '설국'이니 하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56중 추돌사고가 발생했고, 오지 않는 버스에 발음 동동거렸다. 눈의 무게를 못 이기고 쓰러지는 나무에 노인이 유명을 달리하였다.


눈에 덮인 산길은 무서울 만큼 짓밟혀 있었다. 이틀 동안 내린 폭설은 곧고 굵게 자라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의 허리를 뚝뚝 부러뜨려 놓았다. 걸음을 옮겨 딛는 곳마다 어느 때든 대들보가 될성부른 소나무들은 무자비하게  넘어져 있었다. 눈이 짓누르는 무게를 버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러진 소나무 등걸마다 여지없이 드러난 뽀얗고 매끈한 속살 위로  끈적끈적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폭설은 숲에서 발톱을 드러냈다. 마치 이제 모든 것이 자기 세상인 것처럼 세상을 흔들었다. 군홧발로 쿵쾅거리며 세상을 짓밟는, 힘을 자랑하는 점령군처럼.


숲은 겨울로 가득 차 있다. 곧은 나무는 몸통이 댕강댕강 부러져 있었다. 알록달록 단풍을 내어 걸고 있는 활엽수들은 온몸을 짓누르며 쌓인 눈을 못 이기고 그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휘휘 늘어뜨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 꽁무니를 따라 들어온 햇볕이 쏟아질 그때, 쌓인 눈 떨어내고, 허리를 곧추 세운 활엽수들은 폭설과 맞서고 있다. 무슨 소리냐고, 아직 가을이라고, 여기 단풍이 오롯이 남아 있다고. 지금은 겨울의 세상이 아니라고, 오직 가을일뿐이라고. 홍紅, 등橙, 황黃 그리고 초록이 어우러진 활엽수들은 손에 손을 마주 잡고 일제히 허리를 세워 숲을 덮고 있는 눈에 맞서고 있다.


폭설을 맞으면서 더 아름다운 가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숲
제비 한 마리가 여름을 만드는 게 이니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단풍나무


세상을 잠시 덮었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했던  하얀 눈은 곧 힘을 잃을 것이다. 햇볕이 비추고, 사람들이 밟아대면 형편없이 녹아내릴 것이다. 더러운 흙탕물로 참 추하게 사라져 갈 것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큰 나무를 잃었다고 통탄할 것이다. 곱게 물든 가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땅을 칠 것이다.


지독한 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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