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통보하기 하루 전
내일 퇴사를 통보하려고 한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심은 순식간이었다. 이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역가로 일감을 얻은 것도 아니면서 마땅한 수입원 없이 회사를 그만둬도 괜찮을지 머릿속으로 수만 번은 고민했다. 그런데 얼마 전 회사 컴퓨터를 두드리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그만둬야겠다.'라는 결심이 들었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회사에도 번역 공부에도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고 살다가는 정말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았다.
일단 결심을 내리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은 건, 퇴사를 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퇴사를 결정하자마자 두 가지 사소하지만 신기한 일이 생겼다. 하나는 번역 수업을 듣다가 친해진 친구에게서 두 달 만에 카톡이 온 것이다. 나와 나이도 같고, 회사에 대한 고민도 똑같은 애인데, 퇴사할 거라고, 오늘 회사에 말할 거라는 카톡이 왔다. 동지가 생긴 것처럼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가끔씩 밥도 같이 먹고 연락도 하는 회사 선배(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 선배가 옮겨간 회사에 지금 나의 직무와 비슷한 자리가 생겼는데, 혹시 이직 생각이 없냐는 내용이었다. 그분은 내가 번역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아마도 생각 없겠지만 혹시 몰라서 물어본다고 했다. 모처럼 회사를 관두기로 결심한 상태였지만 그 제안을 듣고 솔직히 마음이 좀 흔들렸다.
지금 있는 곳보다 훨씬 좋은 회사였다.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말해도 아무도 모르는 회사가 아니라, 누구나 다 아는 회사. 아마 내 자력으로 그 정도 회사에 들어갈 기회는 앞으로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말할 때도 분명 어깨가 올라가겠지. 친구들도 분명 부러워할 거야. 가족들은 또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할까.
내가 그 회사에 가고 싶은 이유는, 온통 '남'에 관한 이유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나는 어떨까. 나는 행복할까.
나는 지금 회사가 유명하지 않아서, 돈이 적어서 이토록 괴로운 게 아니었다. 이 '일'이 너무도 의미 없고 마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두고 싶었다. 이직을 하면 그곳에서 또 비슷한 일을 하게 될 텐데, 결국 나는 똑같은 고통에 빠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냥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선배는 내 결정을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 열심히 해보라고. 혹시 잘 안되면 여기에서 자리 만들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한다는 말을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실감했다. 말이란 게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닌지도.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 일은 내가 퇴사에 대한 망설임을 털어버리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퇴사를 결심하고 나니 이런 연락을 두 번이나 받은 게, 비록 나는 무신론자지만 꼭 무슨 계시 같았다.
"내가 뭘 선택하든 후회하지 말자. 무언가 실패했다면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자. 무언가 놓쳤다면 앞으로는 놓치지 말자. 누군가를 잃었다면 그 사람과의 추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자. 내가 겪은 경험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들이니까 후회 없이 살자." - 김옥선,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딱 지금이랑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때가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작정 부모님을 졸라 유학을 갔다. 그때도 나는 지금처럼, 그저 현실이 마음에 안 들어서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엄청나게 무서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부모님은 나 때문에 몇 천만 원의 빚을 졌고, 멋지고 아름다운 유학 생활에 대한 로망은 조금도 실현되지 않았으며, 몸서리치는 고독함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도 지금 돌아보면 이상하게 별로 후회는 되지 않는다. (불효자식이 따로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괜히 거창한 목표(번역가가 돼서 지금보다 돈 많이 벌기라던가)를 세우기보다는 딱 하나만 정해두고 싶다. '웬만하면' 후회는 하지 말자. 번역 역시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다시 방황하더라도, 적정한 수입을 얻지 못해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더라도, 되도록 후회는 하지 말자.
퇴사 통보일은 바로 내일로 정했다. 설레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 퇴사가 공공연한 사실이 되기 전에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이니 두서없는 글이라도 남겨두려고 한다. 그리고 정말 내가 번역가가 되어, 번역가로 먹고살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 글을 뿌듯하게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후회는 하지 말자는 이 다짐을 미래의 내가 되새겨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