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자리에서는 아내와 장모님의 티격태격
주일에 마음이 내켜야 가끔 예배를 드리러 가는 청년 아들이 오늘 교회를 따라나섰다.
개신교회를 다니 시다 천주교회를 나가시는 장모님도 함께 동행하겠노라며 자신의 집으로 와서 모셔갈 것을 부탁하셨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로는 냉담자인 상황이던 장모님은 거동과 이동이 여의치 않아 성당 다니시는 것이 힘들어지셨다.
나의 교회는 서울에서 경기도 포천 외곽으로 이전했기에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교회 승합차를 타야 접근이 가능한 곳에 자리했다. 포천 가산면의 한적한 산 아래에 당도하려면 서울 북부에서 30여 킬로를 달려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주일 아침이면 한적한 외곽으로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교회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들과 장모님이 예배에 참여한다고 나서니 의도치 않게 3대가 함께 같은 공간에서 예식을 드리게 되었다.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종교와 신념을 확고히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2대와 3대에 걸쳐 유산처럼 이어지는 것은 또 다른 의미다. 운전석 옆으로 아들을 태웠고 뒷자리에는 아내가 장모님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인 성도가 30여 명도 채 안 되는 예배당엔 모처럼 방학을 맞은 초등부 아이들과 어르신 그리고 청년의 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 일상화된 유튜브중계를 위해 나는 예배당의 맨 뒷자리에 앉는다. OBS를 켜서 유튜브 송출을 연결한 후 오디오를 체크하며 찬양을 드린다. 성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장모님과 아내 그리고 아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느 순간 감사의 마음이 샘솟았다. 신앙은 억지나 강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 일터인데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 시기에 귀한 시간을 내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사용하다니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것 같았다. 누워서 더 잔다고 하거나 공부하느라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한들 달리 뭐라 강제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예배 후에는 밭에서 갓 수확한 옥수수와 감자에 이것저것 넣은 샐러드를 반찬으로 자연식을 즐겼다.
가져온 음식쓰레기는 한창 자라고 있는 호박넝쿨 아래를 파내서 묻었다. 쓰레기는 다시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그 양분을 토대로 다시금 호박은 튼실한 열매로 자라날 것이다. 손톱만 했던 오이가 어느새 길쭉하게 자라서 흐드러지게 매달렸다. 조그맣고 파랬던 방울토마토 몇 알은 먹기 좋은 빨간색 빛깔로 물들었다. 끝물인 상추와 향긋한 깻잎을 따면서 밭이 제공하는 풍성함에 감사했다.
그룹 모임으로 개인의 삶을 나누고 기도제목을 알리면서 또 한 주간 힘내서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본다.
오후 늦게 포천에서 나와 서울로 향했다.돌아올 때 역시 아내와 장모님은 뒷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엔 도란도란 살갑게 얘기를 나눈다 싶다가 도 어느 순간 목소리가 커지면서 쌀쌀하고 냉랭한 전선이 형성된다. 장모님은 단골처럼 “우리 딸들은 쌀쌀맞아서 부드럽게 말하는 법이 없다”며 아쉬워하신다.
아내는 아내대로 엄마는 연세가 드시면서 못 듣는 척하면서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어댔다. 차 안의 공기가 한동안 싸해서 아무도 말을 건네지 못한 채로 음악만 들으며 운전했다.
그래도 소문난 곰탕집 앞을 지날 때가 되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곰탕팩을 사자고 말한다. 아내는 “엄마 한팩 우리 한팩”, 장모님은 자신은 한팩 우리는 두팩을 사라며 의견을 달리한다. 말다툼은 말다툼이고 다시 모녀 관계로 돌아와 장모님을 내려드리고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모녀간이 칼로 물 베기인 건지, 노상 티격태격 거리다가도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여간 재미있은 게 아니다.
'그래도 살아계시니 이런 교감이 있는 거지 안 계시면 얼마나 헛헛할까?'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묘소에 찾아갔던 날이 그 언제였던가?
무심했던 나를 새삼스럽게 돌아보게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