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과 하마가 옆에서 놀아요
케냐 출장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이때다.
우리 일행은 야외에 차린 식탁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얼룩말무리가 저벅저벅 군병들의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지나치는 것이다. 테이블 앞에 펼쳐진 호수가로 일시에 몰려와 다 같이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차분한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진 말발굽 소리에 화들짝 놀랐는데, 대지를 울리는 그 경쾌한 리듬이 곧 호수의 물을 만나 첨벙이는 소리로 바뀌니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뤘다. 청각에 홀려 주위를 살펴보니 수십 마리의 얼룩말이 일시에 호숫가를 점령해서 일사불란하게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빛을 잃어 노을을 남기며 사라지기 시작한 때 희고 검은 무늬의 얼룩말이 약속이나 한 듯 물가를 찾아온 것이다.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찌릿하게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 훈련된 병사들이 행진을 하며 대오를 맞추고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대지를 박차고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역동적으로 달리는 경쾌한 발놀림을 옆에서 보니 마냥 신기했다.
예상치 못한 가슴 벅찬 황홀함이다.
밤이 깊어갈 무렵, 피워 놓은 장작불 주변에 앉았을 땐 더 믿기 힘든 광경이 연출됐다.
검은 그림자의 육중한 움직임이 둔탁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데, 물살을 헤치며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우리 일행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싶은 걱정도 있었지만 불을 피운 상태라 해를 입을 거란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어떤 동물인지 더 궁금했다. 우리 옆을 지나 너른 습지로 나온 것은 바로 하마였다. 20미터쯤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젖은 몸을 말리며 물에서 뜯어온 수초를 먹는 듯 보였다. 소만한 크기의 하마는 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물속에서 노닐다가 해가 들어가는 시간에 맞춰 사방이 어두워진 후에 육지로 나왔다. 깊은 호수의 한적한 물에 몸을 숨겼다가 나오는 것이라 낮에는 잘 안보였다.
드넓은 나이바샤호수와 그 앞 수십 핵타에 자리한 초식동물 사파리에서의 숙박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환상을 안겨주었다. 전후 사방이 확 트인 곳에 사람과 문명의 흔적이 전혀 없는 대자연의 그대로를 바라본다는 건, 인간의 문명이 아무리 찬란한 바벨탑을 쌓는다 해도 빚을 수 없는 웅대하고도 원대한 태초의 기운이다.
300 헥타의 땅에 초식동물사파리를 조성한 olerai house에서는 초원을 걸으며 동물들을 찾아다녔다. 세렝게티 등에서는 당연히 지프를 타고 이동해야 거대한 코끼리나 사자 등의 맹수로부터 안전하지만 이곳은 순한 동물들만 살고 있다. 마사이 복장의 건장한 청년이 우리를 안내하며 1900년대 초반에 자리를 잡고 현재의 모습을 갖춘 숙소의 역사를 소개했다. 관광객을 맞는 7동의 숙소가 독립적이면서 아름답게 세워 있다.
수령이 500년은 족히 넘었을 아름드리나무에 달린 그네에 올랐다. 호수 위를 한껏 날아다니는 각종 새들의 우아한 몸짓처럼 길게 날고 싶었다. 물가에 놓인 썬배드에 잠시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해 본다. 하루만 더 머물 수만 있다면 온갖 우아한 여유를 다 부려보고 싶었지만 일정은 늘 빡빡하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쉼을 얻었다면 어쩜 집에 두고 온 아내에게 더 미안했을지도 모른다.
숙소 안은 더운물이 나오는 욕조까지도 구비되어 있다. 소파와 침대는 아기자기한데 통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빨강과 노랑의 원색 커튼과 만나 신비감을 더했다. 아프리카의 빛과 색상은 강렬하다.
저녁은 실내조명을 은은히 밝힌 곳에서 우리 만을 위한 식탁을 차려준다. 아침과 점심은 빨간 식탁보를 깔아놓은 야외 테이블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었다. 실은 먹기 전에 눈으로 한껏 호강을 하고 비로소 입으로 시식하는 순서다. 자연에 깔아 놓은 밥상을 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 간다. 주변을 장식해 놓은 꽃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강렬한 향기를 풍기는지.
빵에 찍어 먹어보라고 내놓은 꿀은 목이 시큰하고 따가울 정도로 달고 강하다. 직접 양봉해서 딴 것이라 판매는 안 하고 손님에게만 제공하는 것이란다. 손님을 위해 일일이 서빙해 주는 현지인들의 친절함 속에서 식사를 하니 휴식 같은 편안함이다.
아프리카에선 이동 자체가 큰 노동이라 잠시 멈춰 선 순간이 쉼이다.
내 몸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머리는 멍한 채로 진동했다. 계속된 일정 속에서 잠시의 쉼이 오히려 어색했고 시차를 억지로 이겨내고 있는 몸은 한국에서의 시간과 케냐에서의 적응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지나고 보니 나이바샤 리조트에서의 하루는 분명 일생의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찰나처럼 지나갔지만 영겁의 기억 속에서 다시 되뇌어질 것을 예견한다. 문명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대자연만이 줄 수 있는 위대한 힘 앞에 선 연약한 피조물로서의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광활한 태초의 자연 속에 있으면 뚜렷하고 선명해지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런 매력을 발견하는 곳이 아프리카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