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좋아하는 몇몇의 순간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내가 아는 무엇을, 게다가 애정을 가진 대상을, 전혀 뜻밖의 곳에서 발견할 때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러 갔을 때가 그랬다. 아무 배경지식 없이 보러갔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원작이라는 걸 알았다. 알았더라면 주저 없이 봤겠지만, 몰랐는 데도 보게 됐으니 기분 좋은 우연이다. 퍼즐 조각이 맞춰진 것 같은 느낌은 나를 설레게 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아닐까, 새삼 그의 존재의 거대함을 느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영화화 되는 배경에는 여백에 있다고 생각한다. '헛간을 태우다'와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황을 명확하게 그리지 않는다. 틈을 채우는 역할은 독자의 몫이다. 왜 헛간을 태우는 것인지, 왜 죽은 아내와 관계를 맺은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독자가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여백을 채워 또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게 되는 것 아닐까. 왜 저런 행동을 할까를 유추하다 보면 그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 아닐까.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영 시간이 무려 세 시간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인 '해피 아워'는 다섯 시간인데, 그거에 비하면 양반이긴 하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지루하고 길다는 느낌이 들지 않은 걸 보면 꽤 잘 만든 영화는 맞는 것 같다.
주인공 '가후쿠'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걸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문제 없는 결혼 생활이라 생각했기에, 그 일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러다 아내가 (어떤 지병으로 인해) 돌연사하게 되고, 결국 그 일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아내의 부재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다 아내와 관계를 한 '다카하시'를 만나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감춘 채 아내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 앞에서 눈을 감고 싶어질 때가 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 진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가후쿠에게 이 진실은 '아내의 외도'였고, 그는 이 사실을 짊어지고 살기로 한다. 아내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한 채 남겨진 가후쿠는 아내의 부재와 절대 알 수 없는 진실의 이유를 안고 살게 된다. 결과가 어떻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는, 해결되지 못한 숙제를 묵직하게 품은 채로.
조던 피터슨의 책 '질서 너머'에서, 작가는 트라우마든 두려움이든 수면 위로 끌고 와 직면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찌 되었건 해소되지 못한 채로 지금의 삶을 끊임없이 방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뚜껑을 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아내에게 그 사실을 물어봐야 하며, 지금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변화하더라도 마주해야 한다. 도덕적인 잣대는 제외하고, 아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아는 것이 둘에게 더 나을 수 있다고 말이다. 기묘한 상황이지만, 자신의 아내와 잔 남자와 대면하며 거기서 아내가 왜 그랬을까를 짐작하는 일로 풀리지 못한 질문에 매달릴 수도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에.
가후쿠는 경미한 교통사고를 내고 병원에서 녹내장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젊은 여성인 '미사키'가 그의 차를 몰아주게 된다. 어쩌면 자기 차를 유연하고 능숙하게 몰았던 가후쿠가 교통사고를 내고 녹내장을 진단받았다는 것은, 은유적으로는 그간 잘 운전해왔는데 차 사고를 낸 것처럼 그의 인생도 무탈하게 잘 지내온 것 같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사고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보다도 내 차를 더 잘 다루는 미사키라는 인물을 통해 내 방식이 문제가 있었음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아닐런지. 어쩌면 작은 내 차 안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닐까. 나의 시야가 좁았던 게 아닐까.
더불어 가후쿠와 미사키 둘 다 부재를 겪고 있는 인물로서, 동질감을 형성한다.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이유는 정작 아내를 몰랐을 수 있으며 그녀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여다 보지 못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미사키 역시 매일 술을 마시며 주정부리고 자신을 구박하던 엄마가 산사태 속에서 잠길 때, 그것을 보고도 발을 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곁에 있는 사람을 멀리 떠나 보내고 남은 자들은 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진정한 답을 얻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판단한 답을 내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