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낼 모레 육십, 독립선언서>
'전자렌지만 있으면 돼',
시작은 그랬다.
그러더니 며칠이 지나고 말이 덧붙여졌다.
'전기 밥솥 가져갈 거야?', '에어프라이어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다. 전기 밥솥은 더구나 큰 아이가 사준 거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들이 사준 건데, 이러구 씩씩대다가 문득, 이제 또 매일 밥하고, 에어프라이어에 요리하고 그러구 살래? 이런 질문이 내 속에서 불쑥 솟아 올랐다. 더는 이렇게 살지 않는다며?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 아니 더는 이렇게 살 수 없게 되었다. 이게 솔직한 표현이겠다. 스물 다섯에 저 놈이 뭐가 좋다고 라는 말을 들으며 웨딩드레스도 챙길 사이 없이 헐레벌떡 연분홍 한복을 입고 '가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해가 바껴 내 나이 쉰 하고도 아홉, 낼 모레 육십이다. 그 나이에 '결혼'을 작파할 처지에 놓였다.
우리 연배의 '이혼율'이 가장 높다는 말에도 그렇구나 했다. 말이 좋아 '졸혼'이 유행어가 될 때도 꿋꿋하게 남의 이야기려니 했다. 지난 해 봄 나를 역성들다 작은 녀석이 남편과 부자지간에 못볼 꼴을 봤을 때도 아들 녀석이 엄마가 더 실망이라고 하는데도 '가정'을 아니 '남편'의 편을 들었다.
돌아보면 귀신에 씌였나 싶다. 내가 가정을 지켜야지 라고 다짐을 할 때마다 마치 그건 아니지 라고 하는 듯 일이 터졌다. 작년 한 해 동안 서너 차례 돈 사고가 터졌고 우리 집의 빚은 감당할 처지를 넘어섰다. 아마도 언젠가 그 사람도 되돌아 볼 날이 있다면 자신이 뭐에 씌였나 싶게 작년 한 해 동안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물론 처음엔 가지고 있는 돈을 끌어모아, 마이너스 통장을 털어 감당을 했고, 이 정도만 해도 됐다 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또 있었다. 은행이 안돼서, 제 2 금융권의 문을 두드렸고, 그래도 그 정도는 갚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한테서 끝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혹은 이제 겨우 사회 초년생인 아이들에게 그 여파가 흘러갔다. 끝도 없이 터져나오는 빚에 온가족이 고사당하겠다 싶었다.
결국 알량한 보증금을 빼서 다만 얼마간 빛 잔치를 하기로 했다. 자기가 해보니 신용불량할 만 하다고 '가정 경제 복구'를 위해 경제적 파산을 종용하는 남편에 내 이름의 된 빛은 내가 다 갚으며 살테니 각자 살아보자고 했다. 몇 년이나 더 갚아야 하는 빚, 저 빛을 갚고 살겠다고? 막상 매달 빚을 갚으며 보니 참 나도 대책이 없다 싶다. 낼 모레 환갑인 나이에 말이다. 남들은 '은퇴'를 할 나이에 나는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그런 결정을 내린 건 나를 후려치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저 빛이 다 내가 그동안 먹고 산 돈이구나 라는. 예전 어른들 말씀처럼 '남편 덕보고 살 팔자'가 아닌 것이다.
형제들에게 여차저차해서 이렇게 됐다는 보고를 한 날, 작은 언니가 대뜸 '다 니가 잘못해서 그런거'라고 사태를 이렇게 만든데 안타까워 했다. 이른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인데, 그 남편 하나 요리를 못했냐는 거였다. 그 자리에서는 발끈했지만, 그래, 남들 다 한다는 남편 요리, 거기에 이제 두 손을 들 때인가 싶다. 그런데 이젠 더는 그 '요리'를 하느라 전전긍긍하며 살고 싶지 않다. 아니 요리는 커녕, 늘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휘말리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밀려오는 파도에 더는 나를 내맡기기 싫었다. 이젠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더는 그렇게 살면 안될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