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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착의 여운

- <60의 알바천국>

by 톺아보기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있다. 학원에서의 공부를 마치면 실습을 나가게 된다. 실습은 실제 요양보호사가 일하게 되는 요양원, 주간보호센터, 그리고 어르신이 사는 집을 찾아가는 과정이 포함된다.


요양원 실습 과정에서였다. 연세가 거의 아흔 쯤 되신 어르신 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의 모습을 뵈니,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등장하는 쿠마이의 무녀가 떠올랐다. 소원을 말해보라는 아폴론 신에게 영생을 구했던 그녀, 소원대로 영생은 얻었지만 그 시간만큼 늙고 쪼그라들어 병 안에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는 이야기 속 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시간 요람 속 아기처럼 조그맣게 웅크리고 계셨다. 식사로 나오는 미음 한 그릇을 비우는 것도 버거워 하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하루는 어르신이 갑자기 활기를 띠셨다. 와상(침대에 누워 생활하시는) 상태로 평상시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으셨는데 갑자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시면서 당신이 베고 계시는 베개를 가지고 꾸깃꾸깃 무언가를 하려 하셨다.


식사를 가지고 가서 어르신께 떠 먹여 드리려 하는데, 어르신 왈,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거였다. 손님들이 와 계신데 한가하게 밥이나 먹으라 한다며 나무라셨다. 저기 손님들 계신데 손님들 대접을 해야 한다고 하시다가 , 베개를 내밀며 여기 옷을 입혀야 한다고도 하시기도 하고, 바느질을 하는 듯한 제스처를 하셨다. 옷도 준비하고, 음식도 준비해야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며 분주하셨다.


아마도 어르신이 살아오셨던 삶의 한 장면이었으리라. 집에 손님들이 오시고, 그 분들을 대접할 준비를 하랴 분주했던 어느 날이 갑자기 어르신의 기억 속에서 솟구쳐 오르신 듯했다.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 중 많은 분이 인지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 이제는 기억이 많이 흐려지셨지만 그럼에도 그분들에게는 여전히 '천착'해 왔던 삶의 여운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청소해 드리겠습니다 !', 실습의 하루는 청소로 시작된다. 침대 아래, 방 구석구석을 밀고 다니는데 유독 한 분이 칭찬이 후하셨다. 그러면서 청소 잘 한다고 원장한테 잘 말해주겠다며 인심을 쓰셨다. 그러면서 원장님이 당신의 말을 잘 들어준다면서. 아마도 당신이 말씀해 주시면 잘 해줄 거라며 덕담을 하셨다. 아마도 그 분은 살아오시며 윗 분과의 친한 관계를 맺는 것이 큰 힘이 되셨었던 듯하다.


허긴 멀리 갈 것도 없다. 여전히 딸들과 사사건건 실랑이를 벌이시는 요양병원에 계신 구순의 어머님도 그리 다르지 않으시니 말이다. 요로 감염과 폐렴으로 섬망을 겪으며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을 오가던 어머님, 점차 상태가 호전되시면서 이쪽 세상엔 연착륙하는가 싶으시더니 자꾸 챙기시려는 게 늘어나신다. 매일 아침 운동가실 때 민망하시다며 모자를 가져다 달라하시더니 그 품목이 머플러며, 조끼로, 바지로 늘어 갔다. 환자복을 포기할 수 없다면 이불이라도 남들과는 다른 것을 덮으려 하셨다. 아마도 당신이 살아오며 그런 것들이 당신 임을 증명해 보이는 '표지'와도 같은 것들이셨던 듯하다.


반추와 배움의 시간

어머님이나 어르신들의 모습을 뵙고 돌아서면 익룡의 퇴화해 버린 날개짓을 보는 듯 착잡한 마음이 오간다. 그러면서 또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한평생 살아오셨던 모습이 각인처럼 새겨져 긴 그림자로 드리워진 게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역지사지' 나에게로 향한다.


그 분들에 비하면 한참 젊은(?) 나에게 새겨진 각인은 어떤 것이 있을까. 호기롭게 환갑을 맞이하여 그만하면 되었다며 다음 삶의 스텝을 밟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지나온 내 삶의 흔적들이 나를 사로 잡는다.


돌아보니 마흔 살에 독서 논술 지도자 자격증을 땄다. 그로부터 이십 여 년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비록 사교육이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 중에서도 '논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는 자부심이 나에게는 익룡의 날개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몇 명이 되었든, 몇 십 명이 되었든 누군가를 가르치며 살아왔던 시간이, 이제 '요양보호사'라는 새로운 선택을 함에 있어 손 거스러미처럼 거슬린다. 마치 어머님이 화려한 머플러와 조끼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드러내려 하는 그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쳤던 나인데 이러면서 첫 걸음도 떼지 않은 내 발목을 잡는다.


돌아보면 내가 논술 선생 입네 하는 자부심이 무색하게 그리 잘 나가지도 않았는데도 막상 다른 선택을 하려니 이러구 있는 내 자신이 조금은 우습기도 하다. 꼴랑 어떤 대학을 나오고, 무슨 과를 나오고, 내가 뭘 좀 알고 등등, 어쩌면 지나온 나의 시간 곳곳에서 이런 태도로 스스로 내 발목을 잡지는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속담 속 '금송아지'처럼 말이다.


삶의 습(濕)이란, 익숙했던 삶의 방식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삶의 방식을 관통했던 나의 생각, 사고방식, 가치관 같은 것들이 아닐까. 일찍이 철들어 나에게 아로새겨진 생각들이 오래도록 나에게 남아 이제는 유적이 되어버린 그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환갑을 넘어 새로이 무언가를 한다는 건, 그저 새로운 길을 가서 두려운 것도 있지만, 여태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생각들이 나를 잠식하여 걸음 걸음을 무겁게 한다. 안 그래도 나이들어 묵직한 걸음이 그래서 더 무거워 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며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내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어머님을 뵈면서도 '왜 그래?'를 넘어, 같은 DNA를 가진 내게 이어진 그 허명과 허상에 대한 집착을 반추해 볼 수 있는 배움의 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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