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대는 구직중 10>
4월 중순부터 요양보호사 학원을 다녔다.
내가 학원을 간다 하자 친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자격증은 안 딴 다며? 그러게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이쪽저쪽 지원서를 넣었던 곳이 안되면서 지금 하는 것 만으로 호구지책이 충분치 않은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시작되어야 할 일들이 막연하게 미뤄지고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며 내가 얼마나 불안정한 수익 구조에 기대어 노년의 시간을 건너 가려 하는가가 실감이 됐다. 벌어 놓은 것도 없고, 나 대신 벌어줄 이도 없는 처지에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기다리는 시간 알바라도 하겠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았는데, 그 시간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져 갔다. 호구지책이 걱정이면 호구지책을 해결하면 될 일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살아가는 일은 불안과 불투명함 속을 헤치며 나아가는 것이다. 종영한 <미지의 서울>에 명대사가 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고,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바로 그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 그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며 할 수 있는 일 전부가 아닐까.
▲ 학원 © 핀터레스트
내가 환갑을 맞이하여 스스로 결심한 것이 하나 있다. 지나온 '갑'(甲)의 시기, 나는 마치 머리만 큰 아이처럼 늘 이런 저런 생각만 앞서 힘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60년 그만큼 고민하고 고뇌했으면 되지 않았는가, 어차피 웬만하면 또 한 번의 갑이 끝나기 전에 마무리할 인생, 이제 그만 나를 들들 볶자 싶었다.
그래서 편하게 나이듦의 시간을 보내려면 무엇보다 우선 호구지책을 안정화 시켜야 할 듯싶었고, 그 중 가장 적절한 방법이 이른바 '쯩'을 따는 게 아닐까 싶은 거다. 나처럼 호구지책에 고민을 겪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내일 배움 카드' 라는 게 있다. 웬만큼 부자가 아니면 나라가 먹고 살 준비를 하는 사람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내 나이에 딸만한 자격증을 찾아보니 '아이 돌봄 지도사'와 요양보호사가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과 연관성을 가지자면 아이 돌봄 지도사가 적당하겠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활성화되지 않아 일의 전망이 막연해 보였다. 그래서 초고령화 시대 수요가 많다는 요양보호사를 선택했다.
학원 수업을 듣기 시작하자 졸지에 모범생이 되었다. 선생님들은 수업을 하며 이런 저런 질문을 하셨고 용케도 답을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수업을 열심히 듣겠다며 오른쪽 귀퉁이 제일 앞 줄에 앉은 나는 이쪽 분야에 있었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였다.
그게 참 묘한 일이었다. 수업 중 배우는 이런 저런 내용들이 생소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작년에 작고 하신 이모부님은 파킨슨으로 고생하셨고, 돌아가신 큰아버지는 전립선과 함께 방광암으로 고통 받으셨다. 큰 어머니는 고관절 골절로 수술하지 않으면 6개월 내에 돌아가신다는 선고를 받으셨었고, 요양원부터 이제 요양병원에 이르기까지 노환의 정도가 더해지고 계신 어머니야 더 말할 게 무에 있을까.
병환 중에 계신 이모부님은 24시간 간병을 받으셔야 하는 처지셨다. 간병인은 주말마다 쉬었고, 그 시간 동안 사촌들이 번갈아 이모님과 함께 이모부님을 돌보아야 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한 달에 한번 정도 사촌들을 대신했었다. 가급적 움직이시도록 해야 했고, 그래서 식사를 하실 때마다 누워 계신 이모부님을 일으켜 휠체어에 태워드리는 게 큰 미션 이었다. 컨디션이 안 좋았던 하루, 이모부님을 일으켜 휠체어에 태워야 하는데 그만 이모부님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함께 널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제 아무리 일으키려 해도 이모부님은 요지부동이셨고, 결국 수위 아저씨께 도움을 청해야 했었다.
그러니, 요양보호사 교재에 나오는 침대에서 휠체어 이동 도움 같은 내용이 얼마나 실감나게 쏙쏙 귀에 들어 오겠는가. 의료 계통에 일해서가 아니라, 교재에 나오는 다양한 실례가 나에게는 생소한 것들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내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게 되려고 그렇게 주변 분들이 아프셨냐 싶어 혼자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래서 일까, 요양보호사 교육 과정은 한 단원이 끝날 때마다 단원 평가하는 시험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순조롭게 100 점을 연속해서 맞았다. 의기양양 이러다 시험도 100 점으로 통과하는 거 아냐 이러구 야무진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결론은? 아쉽지만 100 점은 맞지 못했다.
▲ 카페인 © 핀터레스트
앞에 쓴 내용만 보면 내가 몹시도 우등생 같지만, 사실 현실은 좀 달랐다. 도대체 몇 십 년 만에 앉아 보는 교실인지, 몇 십 년 만에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인지, 아니 학창 시절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를 했을까 싶게, 졸려도 너무 졸린 것이다.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은 월요일이라서 아침부터 졸렸다. 졸리지 않으려고 커피 믹스를 들이부어도 소용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밥을 먹어서 졸렸다. 심지어 나이가 드니 오후가 되면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가끔 8교시에 시험을 볼 때가 있었는데, 시험이고 뭐고 문제 자체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종종 영상을 틀어줄 때가 있는데, 대놓고 자다 주변을 보면 모두가 쿨쿨~. 첫 시간부터 조는 나이든 학생들을 독려하느라 선생님들은 점심 시간이 지나면 각종 체조며 율동 영상을 틀어주신 덕분에 운동 부족으로 뻣뻣해진 몸을 달래보는 것도 잠시, 앉으면 어느 새 끄덕 끄덕, 하원 길에 얼마나 졸았냐며 서로 너스레를 떨곤 했다.
나이든 학생들은 서로 서로에게 고생했다고 격려하곤 한다. 선생님들이나 학원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다. 졸음과 싸우며 6주을 앉아 배우고, 다시 현장에서 실습 하느라 보낸 2주, 그렇게 2달 여의 시간이 흘렀다.
고생스러웠나? 솔직히 좋았다. 비록 적금을 탈탈 털어 밑천이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배움을 하는 시간이었지만, 모처럼 잡념 없이, 비록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였지만 담백하게 공부에 매진하는 시간이 좋았다. 제 아무리 주변 어르신들 덕분에 생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양보호사와 관련된 낯선 내용들에 헤매였지만, 남의 돈 버느라 이런저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편했다. 새삼 성적이 어떻고, 진로가 어떻고 하면서 끙끙대던 학창 시절이 상대적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구나 하며 되돌아 보기도 했다. 그런데 두 달은 참 빨리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