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이 다 거기서 거기인 진부한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하지만 그저 텅 비어 보이는 밤하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천 개의 별들이 빼곡히 박혀 있듯이, 케이팝 역시 알고 보면 수많은 음악 장르들을 다채롭게 그러모은 컬러 팔레트와 같다.
대중을 매혹시킬 새롭고 신선한 음악을 찾아 늘 방랑해온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케이팝은 현존하는 거의 모든 음악 장르를 자신의 영역 안으로 흡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2020년대 들어 장르성이 그룹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세련된 브랜딩 모델 중 하나로 떠오르면서, 뉴진스의 드럼앤베이스/저지 클럽, 에스파의 하이퍼팝, 르세라핌의 레게톤/아프로비츠 등 메이저 그룹들을 필두로 기존에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낯선 장르들까지도 앞다투어 차용되고 있다.
이처럼 케이팝의 영토 확장 전략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와중에도, 아직 손이 닿지 않은 ‘미지의 세계‘는 드물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높은 잠재력을 지닌, 주목할 만한 장르가 바로 ‘퓨처 펑크 (future funk)‘다.
1. 퓨처 펑크란?
퓨처 펑크는 2010년대 초반 인터넷을 기반으로 베이퍼웨이브, 프렌치 하우스, 디스코, 펑크, 시티팝 등 다양한 장르들이 혼합되어 탄생한 레트로-퓨처리즘 장르다. 퓨처 펑크의 가장 큰 음악적 특징은 샘플링이다. 주된 소스는 대부분 1970~80년대의 일본 시티팝, 애니메이션 OST, 디스코 음악으로, 이러한 음악에서 따온 샘플을 피치 시프팅이나 루핑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현대적으로 변형하여 댄서블한 리듬 위에 얹는다. 하우스나 디스코와 같은 포온더플로어 킥드럼 패턴(4박 모두에 킥이 들어가는 리듬)을 사용하기 때문에 얼핏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퓨처 펑크만의 경쾌한 사운드 텍스처와 다이나믹한 속도감, 맥시멀리즘적 테이스트는 타 장르와 명확히 차별화되는 요소들이다.
한편 비주얼 면에서의 특징도 뚜렷하다. 1980~90년대의 일본 애니메이션, 네온빛 도시의 야경, 컬러풀한 형광 색조 등 친숙한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요소들이 퓨처 펑크와 자주 조합된다. 특히 애니메이션 <세일러문>의 이미지가 퓨처 펑크 뮤직비디오나 커버 아트 등에 자주 활용되는 편이다. 퓨처 펑크라는 이름이 하나의 음악 장르뿐만 아니라 이러한 디자인적 측면을 포함한 총체적인 하나의 미학(aesthetics)을 가리킬 만큼, 레트로 비주얼은 퓨처 펑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구성 요소다.
퓨처 펑크만이 지닌 비비드한 사운드 텍스처와 탄력적인 리듬감은 분명 케이팝의 미학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레트로와 키치라는 두 키워드가 최근 케이팝의 트렌드를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그러한 질감을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테이스트로 풀어낼 수 있는 퓨처 펑크의 잠재력은 매우 뛰어나다. 필자는 이미 지난해 칼럼에서 케이팝의 미래가 될 다섯 개의 장르 중 하나로 퓨처 펑크를 꼽기도 했다 (https://brunch.co.kr/@kpopberdiblue/213).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에서는 좀처럼 퓨처 펑크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사한 특징들을 가진 디스코 장르가 유행하던 중에도 여전히 퓨처 펑크는 주목받지 못했다. 소수의 매니아들 사이에서 케이팝 곡의 퓨처 펑크 버전 리믹스가 꾸준히 제작되어 유튜브 등지에서 향유되었지만, 언젠가 유튜브의 팬메이드 리믹스가 아닌 ‘진짜‘ 케이팝 퓨처 펑크 트랙을 듣게 될 날은 그저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너무나도 갑작스레 그 날이 와 버렸다. 때는 바야흐로 지난 6월 16일 월요일,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퓨처 펑크를 하는 아이돌‘이 정말로 등장하고야 말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걸그룹 아일릿(ILLIT), 노래 제목은 ”빌려온 고양이 (Do The Dance)”다.
2. 케이팝 최초의 퓨처 펑크, 아일릿 "빌려온 고양이"
“빌려온 고양이”는 케이팝 최초의 퓨처 펑크 노래다. 첫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장르의 특징들을 선명하게 살리며 거의 완벽한 재현을 이뤄냈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 빈티지한 스트링 샘플이 흘러나오고, 이윽고 끊어치듯 빠르게 피치업되더니 강렬한 비트 드랍과 함께 댄서블한 리듬을 휘감으며 날아오른다. 평범한 소녀에서 화려한 마법소녀로 변신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듯한 이 인트로는 세일러문으로 대표되는 퓨처 펑크의 이미지와 아일릿의 마법소녀 콘셉트를 자연스럽게 상응시키며 당위적인 연결고리를 만든다.
여기서 사용된 샘플은 1989년 개봉된 일본의 SF 애니메이션 영화 <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OST “優雅なる脱走(우아한 탈주)“다. 원작 만화가 누계 1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스페이스 오페라 작품은 80~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향수를 그 기원으로 삼는 퓨처 펑크의 미학을 정확히 관통한다. 이러한 작품에서 샘플을 따와 현대적으로 편곡했다는 사실은 아일릿이 퓨처 펑크 장르의 핵심적인 미학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장르의 관습을 존중하며 충실하게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꿍실냐옹‘, ‘둠칫냐옹’ 등 엉뚱한 표현이나 ‘심장아 나대지 마‘, ‘근데 왜 뚝딱대‘ 등 MZ스러운 신조어를 활용하는 등 장난스러운 가사를 통해 퓨처 펑크 특유의 유쾌한 정서를 현대적으로 덧입히기도 한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같은 의미인 빌려온 고양이라는 속담 표현을 내세운 곡 제목 역시 아일릿 특유의 키치한 테이스트가 돋보이는 선정이다.
이처럼 치밀한 기획을 바탕으로 탄생한 “빌려온 고양이”는 세련된 프로덕션을 통해 퓨처 펑크 본연의 청각적 재미를 케이팝과 능숙하게 접합한다. 빈티지한 음색의 악기들과 현대적인 전자 텍스처의 소리들을 밀도 높게 레이어링해 댄서블하고 펀치감 있는 퓨처 펑크 특유의 사운드를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경쾌한 에너지를 내내 머금고 내달리는 “빌려온 고양이”의 역동적인 속도감은 상상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청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물론 첫 시도인 만큼 아쉬운 점도 있다. 음악 내부의 모든 지점에서 퓨처 펑크를 충실하게 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주얼 측면에서는 퓨처 펑크의 흔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빌려온 고양이”의 뮤직비디오는 주로 초록과 연파랑의 편안한 파스텔톤 색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퓨처 펑크 아트가 주로 채도 높은 형광색을 사용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잘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다. 또한 퓨처 펑크의 ‘필수 요소‘인 옛 애니메이션이나 네온사인 등도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빛나는 야경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 후반부 정도가 유일하게 퓨처 펑크적 미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번 앨범의 브랜드 필름에서 “WE WERE ALL MAGICAL GIRLS (우리는 모두 마법소녀였다)”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전작부터 이어져온 마법소녀 콘셉트를 전면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콘셉트를 가장 ‘찰떡‘으로 활용할 수 있는 퓨처 펑크 곡에서는 이렇다할 마법소녀 이미지의 활용이 부재하는 것도 아쉽다. 다만 이는 뮤직비디오에 국한되는 이야기일 뿐, 컨셉 포토 등에서는 의상과 헤드 피스, CG 효과 등을 통해 더욱 직접적으로 마법소녀 콘셉트를 선보이며 이를 보완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아일릿의 이미지가 일본풍으로 고착화되는 것을 경계한 빌리프랩의 의중이 담긴 듯하다. 보도자료에서 "빌려온 고양이"의 장르를 퓨처 펑크가 아닌 프렌치 하우스라고 소개하거나, 가사에서도 ‘Ah Oui’, ‘J’aime danser avec toi’ 등 프랑스어를 적극 활용하는 등 유럽의 이미지를 덧씌워 기존의 이미지를 중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3. 퓨처 펑크와 아일릿의 미래
오랜 기다림 끝에 퓨처 펑크는 드디어 케이팝의 영토 안으로 입국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손을 내민 주인공은 아일릿이었다. 데뷔곡 “Magnetic”에서부터 옛 마법소녀물 애니메이션의 향수를 적극 활용했던 아일릿이 퓨처 펑크에 손을 뻗게 된 건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으리라.
앞으로 케이팝-퓨처 펑크 곡이 또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빌려온 고양이”가 케이팝 산업 내에서 퓨처 펑크 카테고리를 굳건하게 지탱할 ‘장르의 대표작이자 최고작‘으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할 것임에는 의심이 없다. “마그네틱”의 플럭앤비에 이어 이번의 퓨처 펑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마이너 장르를 케이팝과 융합하는 과감한 음악적 실험을 이어 오고 있는 아일릿의 도전을 흥미로운 마음으로 응원해 본다.
* 위 글은 2025년 6월 19일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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