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켠 Aug 29. 2024

24시간의 밤

남편의 팀원이던 여직원이 회사에서 자살했다. 유서엔 남편과 불륜관계였다고

스물 몇 살 짜리 여자애가 죽었다.


회사 사옥 옥상에서 투신해서.


점심 시간에.


오전에 팀장과 면담한 후에.


남편이 팀장인 팀의 팀원이었다.


책상 위에 A4 종이에 펜으로 쓴 유서를 남기고.


팀장과 불륜관계였다고, 팀장님 와이프에겐 죄송하다고.


유서 위에 놓인 펜은 보이스레코더였다.


“같이 점심 좀 하지. 로비로 나와.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라고 녹음된 남편의 목소리.


생각이 뚝뚝 끊긴다.




“걔가 왜 그랬을까?”


“몰라. 진짜야. 나 믿지? 절대로 불륜 아니야.”


“죽을 사람이 거짓말했겠어?”


“나 엿 먹이려고 그랬겠지. 요새 애들, MZ세대라서 맹랑하잖아.”


“남 엿 먹이겠다고 자기 목숨을 버려?”


“걔 미친년이야. 다 거짓말이야. 맨날 출근 전에 업무준비는 안 하고 8시 59분까지 회사 컴퓨터로 소설 쓰고 있었어. 작가가 꿈이라고. 무슨 소설 쓰듯이 허무맹랑하게 불륜이 뭐야, 불륜이. 추잡스럽게. 머리 쓴 게 고작 그거야?"


“트집 잡힐 만 한 거 없어? 빌미나 여지를 준 건 없어? 생각해 봐.”


“지 아이디어만 기발한 줄 알고 아이디어만 툭툭 던지길래 일이 되게 하려면 근거, 데이터, 실행방안, 시뮬레이션, CS 대응방안까지 다 기획서에 녹여 오라고 한 마디 했어. 그랬더니 그거 좀 혼났다고 삐져서 확 일 저지른 거야. 알잖아, 내 스타일. 혼내고 달래주는 거. 따끔하게 한 마디 하고 앵돌아있지 말라고 밖에 나가서 법인카드로 맛난 거 사 주면서 개인사도 물어보면서 기분 풀어주는 거. 이야, 요새 애들 영악해. 내가 맨날 피드백을 주면 나중에 잊어버렸다고 하지 말고 메모 좀 해서 빠릿하게 반영하라니까 펜 모양 레코더 깔짝거리면서 필기하는 척 하더니 사람 말을 오해하기 딱 좋게 잘라서 녹음해 놓고 증거랍시고 보란듯이 내놓은 거야.”


“정말 그 말만 했어? 다른 녹음파일이 또 나오면?”


“별다른 얘긴 안 했어. 이건 정말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업무 스타일이나 그런 게 우리 팀하고는 안 맞는 거 같으니까 다른 팀 알아보고 얘기하면 언제든지 보내준다고 했어. 부장님께도 말씀드려서 받아주겠다는 팀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죽었구나. ‘너 일 못하니까 방출이다’란 말을 돌려돌려 예쁘게 한 거잖아. 그 얘길 부장이랑 다른 팀 팀장 귀에까지 들어가게 한 거고. 그리고 팀장 눈 밖에 난 팀원을 어느 팀에서 받아주겠어? 팀장이 인사고과도 낮게 줬을 텐데.”


“그거 가지고 자살을 왜 해? 퇴사를 하면 되지.”


“당신 때문에 죽었구나. 기어이.”


“뭔 소리야, 그게. 불륜 아니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대기발령 그거 징계위원회 열릴 때까지만이야. 그 동안 맨날 야근하느라 피곤했는데 이 참에 쉬어가지 뭐. 애들 등하원은 내가 시킬게. 하루 날 잡아서 어디 놀러라도 갈까? 인상 펴. 징계위원회 별 거 아냐. 작년에 팀장이 갈궜다고 유서 써 놓고 죽은 애 있었는데, 그 팀장 감봉 1개월 받고 끝이었어. 지금도 회사 잘 다니고 있다고.”


“그래서 불륜이라고 했구나. 팀장이 괴롭혔다고 하면 회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복수할 수 없으니까. 불륜이라고 해야 우리 가정이 망가질 테니까.”


“불륜 아니라고 했잖아!”


“집에서 늘어진 옷 입고 있는 나보다 회사 다니는 젊고 예쁜 아가씨가 끌리지 않아?”


“아니라고, 아니라고 몇 번을 말 해! 에이 썅, 짜증나게. 회사나 집구석이나…”


남편은 모른다. 남편이 아이들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보란듯이 모니터 화면에 띄워 놓고 일하는 동안 내가 몇 번이나 베란다에 나가 어디로 떨어져야 잔디밭이나 남의 차 위가 아닌 아스팔트 바닥에 추락해서 즉사할 수 있는지 계산해 본다는 걸. 남편이 퇴근한다고 카톡하면 허겁지겁 종종거리며 아이들이 어지른 집안을 정리하는 내 꼴을 못 봤으니까. 다음날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또 어질러질 텐데. 매일 집구석에서 제풀에 지쳐 짜증나서 아이들에게 누구는 정리하고 누구는 어지르냐며 바락바락 소릴 질러서 아이들을 울리고선 뭘 잘했냐고 윽박지르다가 조그만 손들이 뭐라도 거들어 보겠다고 천천히 통에 장난감을 하나씩 쑤셔 넣고 있으면 비키라고 화풀이하며 그 손들을 탁탁 쳐 내고서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밖에서 애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유서를 쓰다가 애들은 아무 잘못 없는데 그럼 대체 이게 다 누구 잘못일까 하고 울다가 아이들도 나도 울음이 잦아들 때쯤 남편이 지친 모습으로 들어오면 집안은 정돈되어 있고 귀여운 아이들은 마귀할멈 같은 엄마한테서 구해 줄 아빠에게 달려가 안기니까.


나도 보이스레코더를 사 둘 걸. 요즘은 기억이 드문드문 난다. 남편이 저번에 다려 두라고 했던 셔츠는 어떻게 했냐고 하는데 정말로 기억이 안 났다. 애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애 낳으면서 뇌도 같이 낳았나 봐요”하고 농담했더니 의사는 심드렁하게 산후 우울증이라고 했다. 우울증이 오래 되면 인지능력이 떨어져서 기억력도 떨어진다고. 죽은 애도 우울증이었을까.


남편과 나는 고향의 중소기업에서 만났다. 둘 다 그 지역에서 공부를 잘 하긴 하는데 서울 가긴 조금 모자란 애들이 많이들 가는 지방대를 나와서 집에서 멀지 않은 조그만 회사에 취직했다. 대기업의 하청업체라서 부모님은 명절날 친척들에게 내가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떠벌리곤 했다. 내가 신입으로 입사했을 때 남편은 대리였다. 남편은 엄한 사수였다. 갓 입사한 신입이 예절이든 업무든 센스든 부족한 게 당연한데도 사무실에선 눈물 쏙 빠지게 다들 들으란 듯 혼을 내고 “같이 식사 좀 하지.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라며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따로 만나 맛있는 걸 사주면서 아깐 미안했다고, 그런데 회사에 빨리 적응하라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다 몇 번은 사무실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둘이 사귀냐고, 그래서 김 대리가 사내연애 안 들키려고 일부러 큰 소리로 혼내는 척 한 거냐고 놀려댔다. 남편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사내연애로 오해 받는 게 싫어서 앞으로는 회사 밖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아니면 회사 사람들 가지 않는 식당으로 가거나. 그 날 남편은 고백했다. 결혼을 전제로 연애하자고.


그 때 나는 어렸다. 그 때는 대리가 높은 사람 같았다. 나보다 훨씬 일도 잘 하고 센스도 있고. 부모님께 남편을 소개할 때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남편은 내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게 남편의 계획이었다. 입사지원서를 보고 가정환경도 무난하고 적당히 예쁘고 형편도 비슷하고 순진하고 애 둘 낳아서 내 집 마련 해서 그럭저럭 남들처럼 살 수 있는 여자란 판단을 내리고서 일부러 나를 겁먹게 했다가 달래주었다가 하며 길들인 거다. 사내연애한다는 소문을 내려고 일부러 회사 근처에서 눈에 띄게 굴면서. 내게 소리지르는 건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내연애를 들키지 않기 위한 연기였다고 믿게 하면서. 회사에 우리 사이가 소문난 후부터 남편은 더 이상 사무실에서 대놓고 나를 혼내지 않았다. 아주 자상해졌다.


좁은 사무실에서 사내연애하면 분위기 불편해진다고 해서 내가 퇴사를 했다. 대리님이 나보다 일을 잘 하니까, 내가 퇴사하는 게 회사에겐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자기 때문에 퇴사했으니 내 인생을 책임지겠다며 프로포즈를 했고, 이 사람이 누군지 아직 잘 모르는데도 회사 대신 가정에라도 소속감이 있었으면 해서 서둘러 결혼했다. 아니, 어렴풋하게 느꼈다. 이 남자는 가해자가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로 피해자가 될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학교도 직장도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했다. 남들처럼 아이를 낳을 건데, 내가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모성애 넘치는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아빠가 강한 사람이어야 했다.


결혼을 하고 재취업을 하려고 하긴 했다. 그런데 면접만 보면 왜일까, 연애하던 시절 대리님한테 혼나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낯선 곳에선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지방에 그나마 괜찮은 회사란 뻔해서 몇 군데 탈락을 하고 나니 갈 곳이 없었다. 그 무렵 임신을 했다. 어차피 낳을 거면 젊을 때 낳는 게 나았다. 출산 때까지 구직을 중단하기로 했다. 남편은 자기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전업 주부인 나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힘들게 일하고 퇴근하면 집안은 반짝반짝하고 포근하고 안락해야 했다. 그럼 나는 어디로 퇴근하지.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아파트 10층인 우리 집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첫째를 낳고 둘째는 천천히 낳으려고 했는데 덜컥 아이가 생겼다. 둘째가 신생아 꼴을 면하고 나니 대단치도 않은 중소기업에서 경리 업무나 했다가 그마저도 잘하지도 못 한데다가 그 경력에 마저 공백이 있고 이제 애도 있고 나이도 있으니 사무실에서 컴퓨터 놓고 하는 일은 못 하게 되었다. 남편은 팀장으로 승진했고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하청업체 팀장 중에서 독보적으로 일을 잘해서 원청에서 특별채용했다고 했다. 사실 남편이 처음에 이 회사를 선택한 것도 언젠가 원청 대기업에 가겠다는 원대하고 허황된 꿈을 품어서였다. 원청에선 남편의 팀에 있던 팀원 중에 몇 명이나 퇴사했는지, 남편이 하청의 하청회사를 몇 개나 말려 죽였는지는 보지도 듣지도 않고 절감된 비용만 보고 남편을 발탁했다. 이런저런 인맥으로 이리저리 얽힌 좁은 동네에서 어린이집을 가건 집 근처 가게를 가건 남편을 욕하는 소리를 듣다 보니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남편의 월급으로 먹고 산다는 이유로 고개가 숙여지고 사람을 피하게 되고 애들 친구 엄마들이랑 맘편히 카페에서 숨돌리기도 어려웠다. 이직을 하면서 서울로 간다고 들뜨던 남편이 서울 집값을 보고 일단 경기도로 갔다가 얼른 승진하고 인센티브 받아서 대출금 갚고 서울에 입성하자고 했을 때, 후련함과 불안함이 마음 속에서 바쁘게 오갔지만 남편만 믿으면 된다고 나 자신과 애들을 달랬다.


남편은 얼른 인정받고 싶어서 지방대에 하청 출신이라고 얕보이기 싫어서 매일 야근했다. 이제는 돈을 아끼기보다 돈을 벌어오는 일을 해내야 했다. '아 그거 김 팀장 프로젝트지' 하는 걸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윗사람의 의중을 잘 캐치해냈다. 임원들이 아이디어를 툭툭 던지면 그걸 ‘말이 되게’ 만들어 왔다. 실무자들은 ‘그렇게 하면 망한다’고 했지만 남편은 안 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일단 해서, 안 되는 걸 보여줘야 윗 분들 설득이 된다’고 했다. 안 된다는 걸 보여 주면 임원들은 되게 하라고 했다. 그 덕분에 남편도 남편의 팀원들도 과로를 했다. 남편은 힘들어 했다. 조바심냈다. 자기만의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고 했다. 기존 팀원들은 안 되는 걸 되게 하려다가 지쳐서 퇴사하거나 나가고, 남편은 인사팀에 일이 많으니 사람 좀 뽑아 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 애가 남편의 팀에 왔다.


서울대를 나온, 공모전도 여러 번 수상했다던 스물 몇 살 짜리 애. 남편은 매주마다 업무 보고를 시켰고, 팀원들은 보고서 쓰느라 일할 시간이 없었고, 팀원들 다 있는 사무실에서 신입에게 “너 서울대 나왔다며, 잘할 수 있지?”하며 계속 ‘서울대답게’, ‘MZ세대다운 발칙하고 통통 튀는’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라고 하고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이 현실성 떨어지는 아이디어를 가져 오면 완벽하게 기획서로 만들어오라고 하고, 혼자 끙끙대며 멋진 피피티 장표를 만들어 오면 기본 아이디어가 설득력 없다고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되돌려 보내기를 반복하고, 왜 아이디어만 내고 상시운영업무는 손 놓고 있냐고 “서울대 나와서 공부머리만 있고 일머리는 없어?”라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그래 놓고 회사 근처에서 밥을 사 주면서 부모님 직업이나 물어보면서 밥 먹는데 업무 얘기하면서 회사 업무는 자기 같은 팀장 만나서 기본부터 잘 배워야 한다고 잘 가르치고 타일렀겠지. 피리를 불어 놓고 코브라가 머리를 들면 밟고 또 피리를 부는 악사 같았다. 남편은 불륜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 자기보다 뭐 하나라도 잘난 여자를 좋아할 리 없다. 그 여자를 자기랑 동등한 레벨로 끌어내리기 전까지는.


나는 안다. 그 애는 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대 씩이나 나왔는데 인생을 책임져 줄 남자도 없이 덜컥 퇴사를 하면, 맨날 팀장한테 혼나는 어리버리한 애를 받아 줄 회사는 대한민국에 아무 데도 없다고 겁을 먹고 매일매일 하루하루 버텼겠지. 그러다가 옥상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봤겠지. 


남편이 집에 들어 올 때까지 잠들지 않고 기다렸다. 그럼 남편은 맥주 한 캔 마시면서 나를 앞에 두고 무리한 일정으로 일을 시키는 상사, 말귀 못 알아먹는 부하 직원, 은근히 자기를 깔본다는 옆팀 팀장을 욕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달 대출금을 갚고 애들은 알아서 잘 크고 있고 집안은 깨끗했다. 아파트 화단을 한참 내려다 보았다가 병원에 다녀온 날부터 수면제와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영양제라고 하고 남편에게 먹였다. 남편은 약기운에 절어 푹 잘 잤다. 나는 그 옆에서 남편 폰으로 메신저를 샅샅이 훑고 블라인드 앱에 들어가서 남편 회사 얘기를 읽다가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진짜 불륜이야? 인사팀에서 조사했다며. 아무 말 없어?”


“사내 메신저, 메일 싹 다 뒤졌는데 별 거 없었대. 신고, 고발, 면담 요청, 제보 아무 것도 없었어. 정말 나 때문에 힘들어서 뛰어내린 거면 진작에 부장님한테 꼰지르거나 인사팀에 하소연을 했겠지. 요즘 애들 자기 권리 잘 찾아 먹잖아.”


내가 힘들다는 얘기를 남편한테, 애들한테, 부모님한테, 친구한테 했었나? 다 잘 지낸다고 다 잘 되어간다고만 했지. 부장도 회사도 다 팀장 편일텐데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해. 이미 부장은 팀장이 그 애를 '업무 부적응자'라고 했을 때 끄덕끄덕 했는데.


“그 애, 입사 동기한테는 '밤이 24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월요일이 오는 게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힌다'고 했다며. 캡처가 나돌던데.”


“직장인 중에 출근이 기다려져서 밤잠 설치는 인간이 누가 있어. 직장인이면 누구나 다 하는 소리야.”


“'팀장이 나를 말려 죽인다'고 했다며.”


“말라 죽는 건 나야. 내가 욕을 했어, 모욕감을 줬어, 폭력을 썼어?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유서랍시고 밑도 끝도 없이 말도 안 되는 낙서를 해서 애먼 사람 피말리고 있어. 상사 욕 하는 직장인이 지 하나 뿐인 줄 아나."


남편은 나날이 피둥피둥 살이 찌고 있다. 체중 증가는 정신과 약의 흔한 부작용이다. 사람이 좀 수척해야 불쌍해 보일텐데 남편은 오히려 살이 올라서 얼굴이 달덩이처럼 좋아 보인다. 나는 밤마다 나무토막처럼 잠든 남편 옆에서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 남편을 깨운다.


“차라리 강간이나 폭행이었으면 좋겠어. 범죄라면 무죄를 입증할 수 있잖아.”


“내가 걔랑 불륜했다는 증거 있어? 그깟 밥 먹자는 목소리 한 마디 가지고 상상력으로 막 부풀리지 마. 내 폰에 메신저 다 보여 줄게.”


“메신저는 이미 다 지웠겠지. 아니면 텔레그램처럼 기록이 남지 않는 메신저를 썼거나. 바보가 아니면. 사내 연애로 결혼한 사람이 사내 불륜 저지르지 말란 법 있어? 한 번 해봤으면 두 번은 더 쉽지.”


“내가 사무실에서 아무 여자나 쫓아 다니는 줄 알아? 야, 걔는,”


“그렇게 당당하고 결백하면 내가 회사 찾아가서 여직원들 만나봐도 돼? 같은 여자끼리만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으니까.”


“너 절대 회사에 얼씬하지 마. 지금도 내가 걔 자존심 지켜 주려고 다른 팀원들 앞에서 뭐라 안 하고 회의실에 데려가서 충고한 거 가지고 둘이 몰래 뭐 했냐고 해서 CCTV다 뒤져 보라고, 나 떳떳하다고 하느라 돌아 버리기 직전인데.”


“CCTV에 목소리는 안 나오잖아. 우리 연애했을 때처럼 화내고 혼내는 척 하면서 눈 찡긋거리고 입 모양으로 신호 보내고, 그랬겠지. 훈계하는 척 하면서 다른 말했는지 누가 알아.”


남편은 꿈도 꾸지 않고 푹신한 침대에서 포근한 이불을 덮고 목과 머리 굴곡에 맞춘 메모리폼 베개를 베고 잘 잔다. 약발이 좋긴 좋다. 깨지 않는 남편을 여기저기 꼬집어 대다가 남편 폰으로 알람을 맞춘다. 징계 수위가 결정될 때까지 출근을 안 하는 남편이 알람에 깼다가 알람을 끄고 돌아 누우며 잠꼬대처럼 말한다.


“너 진짜 회사는 건드리지 마. 대출금 갚고 애들 대학 보낼 때까지는 이 회사 다녀야 돼. 애들 학교 들어가면 니네 아빠 뭐하시니 할 때 대기업 다녀요, 해야 할 거 아냐.”


“당신은 아무 잘못 없어? 걔가 꽃뱀이었던 거야? 이것저것 잘 가르쳐 주는 팀장님 친절을 사랑으로 오해해서 지 혼자 난리친 거야?”


“아 정말 미치겠네. 꽃뱀 그런 거 아니라고.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


“근데 그럼 걔가 왜 죽어!”


“걔가 네 친구야? 왜 계속 걔 편을 들어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 가? 내가 네 남편이고 애들 아빠야.”


“그럼 걔가 짝사랑한 거야? 죽을 만큼 대단한 순애보였어?”


“너 의부증이야. 아님 피해망상. 병원 가 봐.”


산후우울증일 때는 아무 말이 없던 남편이 의부증은 병원 가 보라 한다. 나는 의부증이 아니다. 남편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 애도 거짓말하지 않았다. 집 안에만 있는 나도 다 알 수 있다. 그 애가 투신한 이후로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지 않게 되었다. 나도 남편처럼 집요하게 남편을 괴롭힌다. 내가 잘 수 없는 밤마다 미친년처럼 남편을 깨운다. 깨워서 화내고 소리지르고 캐묻고 추궁하고 의심하는 척 하고, 아침에 애들과 4인용 식탁에 둘러 앉아 계란 후라이를 부쳐 주고 지난밤에 아무 일 없었던 듯 애들을 하나씩 맡아 등원준비를 시키고 남편과 동네 카페에 가서 시시덕거린다. 가족 모두가 나가기 전 돌아본 현관에 걸린 웨딩사진 속 스물 몇 살짜리 애는 진한 화장을 하고 어깨를 드러낸 웨딩드레스를 입고 긴장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고 있다. 아이들이 오고 집이 어질러지고 남편이 애들과 놀아주고 나는 정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애들을 재우고. 내가 결혼한 남편을 잘 모르겠고 내가 낳은 애들의 얼굴이 낯설고. 그리고 밤이 오고, 그 밤이 24시간이었으면 좋겠다.


남편네 회사 회장 아들이 사고 친 후에 생겼다는 인권경영 부서에서는 메신저, 메일, 직원 면담 등 모든 사실관계를 파악한 결과, 직장갑질도 괴롭힘도 불륜 같은 부적절한 행위도 없었으니 회사의 명예와 고인의 평안과 왜곡된 소문으로 인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임직원의 적극 협조, 아니 침묵을 바란다는 공지를 대외비라며 사내 게시판에 띄웠다. 인사팀에서는 징계위원회를 취소했다. 짧은 휴가를 보내고 남편은 사무실에 복귀했다. 죽은 애의 컴퓨터는 포맷되어 자산관리부서로 넘어갔다. 옥상은 폐쇄되었다. 남편은 옥상 대신 1층으로 내려가 사옥 밖에서 담배를 피웠다. 절대로 위를 올려다 보지 않았다.


남편의 팀원이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남편은 또 소리를 질렀다. 아이디어를 팀장한테 설명하지 말고, 직접 검토하고, 그걸 바탕으로 결론까지 직접 생각해서 의견을 주면 좋겠다고. 각 안 별 장단점을 언급하고 그 중에서 어떤 안이 적절한지 의견을 피피티 장표로 정리하라고. 이걸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하냐고. 대기업만 다닌 애들은 분업만 해 봐서 뭘 하나 붙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할 줄 모른다고. 다시 해 오겠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퇴근 전까지 되나? 야근하겠습니다. 남편은 그걸 부장, 이사, 사장에까지 보고했다. 높으신 분들은 모두 흡족해했다. 역시 눈에 확 띄는 인재야. 특별히 발탁될 만 해. 그런데 이거, 법적으로도 문제 없겠지? 요새 하도 정치권에서 대기업 길들이기하고 있어서. 아, 그럼 간단히 법무검토 받아보겠습니다.


법무팀에서는, 그 애의 죽음에 남편이 법적으로 아무 책임이 없다고 했던 법무팀에서는 남편의 프로젝트가 개인정보보호법에 저촉된다고 결론냈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단계별로 챙기고 따져 볼 시간과 여유 없이 몰아치기만 했으니 아무도 법무 검토 같은 사소한 일은 신경쓰지 못 해서 놓쳐 버렸다. 왜곡된 소문이 퍼져 나갔다. 김 팀장은 입만 살아서 지적질하는 거 말고 뭐 하나 지가 할 줄 아는 게 있나? 잘 된 거 보고 컨펌하는 거야 누구나 다 하지. 못난 걸 보고 어디를 어떻게 수정해야 할 지를 알려줘야지. 그걸 못 하니까 계속 다시, 다시, 다시만 하는 거 아냐. 그 팀장 밑에 있어봤자 성장 못 하고 사람만 망가진다. 팀장한테 빨아먹히기 전에 능력 남아 있을 때 탈출해야 돼, 그 팀은. 하청업체에 있을 때도 사람 쥐어짜는 거 말곤 제대로 한 게 없었다며. 그러니까 맨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다 제대로 해서 가져오라고 팀원들만 족치지. 팀원들이 다 할 거면 대체 팀장이 하는 게 뭐야? 윗사람들 앞에서 입 털어서 자기 얼굴 각인시키는 거? 남편은 밤마다 그런 얘기들을 그대로 옮기다가 잠들었다.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이 나 밖에 없다고 했다. 이제 어떻게 하냐고, 죽고 싶다고 했다. 상담을 받으라고 했더니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혼자 계속 취한 사람이 토하듯 털어 놓았다. 나는 그럼 누구한테 내 얘기를 해? 영양제인 척 하는 수면제를 먹고 잠든 남편의 귓구멍에 대고 그만 좀 하라고 해야 돼?


한밤중에 베란다에 나와 죽은 애의 컴퓨터 속에 있었을 미완성 유작을 생각한다. 모든 작가의 첫 소설은 자전적일 수 밖에 없다는데. 이 소설의 장르가 스릴러였으면 좋겠다. 그 애를 죽인 진범을 찾아가는, 내 남편이 아니고 배후의 거대한 음모란 걸 밝혀내는. 아니면 아내를 가스라이팅하는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 남편을 죽이는. 그러나 이건 그냥 그저 그런 평범하고 흔하고 뻔한 막장 드라마. 팔리지 않을 이야기. 나는 그 애 만할 때 서울 가서 출판사에 취직하고 싶었다. 파주 출판 단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책 좋아하니까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더라. 애들 그림책 말고. 여기 올라올 때 읽지 않는 소설책은 다 버렸는데.




왼손으로 펜을 들어 그림책 맨 뒷장을 북 찢어내어 식탁 위에 올려 두고 쓴다.


남편이 나를 오랫동안 폭행했다고. 때렸다고. 팼다고. 아이들에겐 미안하다고.


아침이 오기 전 새벽에.


남편 혼자 '대화'라는 걸 한 후에.


스마트폰 속 음성녹음파일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유서랍시고 밑도 끝도 없이 말도 안 되는 낙서를 해서 애먼 사람 피말리고 있어.”


생각이 명료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