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변기에 앉아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욕실 벽면에 붙어 있는 ‘낱말퍼즐’에 시선이 닿는다. 용변을 보면서 편하게 글씨를 쓸 수 있는 위치다. 아버지는 낱말퍼즐의 빈칸을 채우면 즉각 새것으로 바꿔 놓는다. 아버지가 써놓은 글자들의 자음과 모음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유제품, 독수리, 휴가, 지붕, 박물관…… 아버지가 휘갈겨 쓴 정답을 또박또박 읽어본다. 아버지는 여전히 이 놀이를 즐기고 있구나.
오전 열 시가 넘었다. 아버지는 집에 없다. 현관으로 가본다. 아버지의 슬리퍼가 없는 걸 보니 금세 들어올 모양이다. 나는 공연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거실과 베란다를 왔다 갔다 했다.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늦잠을 잤거나 공간이 바뀌어서? 이상하게 아파트가 낯설다. 평일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다. 나는 이 집에서 일요일이면 으레 늦잠을 잤고, 일어나 보면 대개 혼자였다. 여느 일요일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투명한 거미줄이 사방 여기저기에 얽혀 있어 내 몸을 가로막는 듯했다.
햇살이 맑게 스며든 주방에서 알싸한 생강 냄새가 풍긴다. 큼지막한 주전자가 가스레인지 위에 놓여 있다. 뚜껑을 열자 수증기가 뭉텅 피어오른다. 인삼, 대추, 생강을 넣고 끓인 물이다. 얼마나 오래 달였는지 대추가 퉁퉁 부르텄다. 물이 불그죽죽하다. 나는 허리를 살짝 굽혀 얼굴에 수증기를 쐤다. 종잇장 같은 피부가 스멀스멀 살아나는 기분이다. 현관문이 열렸다. 아버지의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방금 이발을 했는지, 아니면 최근에 머리를 깎았는지 아버지는 아주 말끔했다.
“어디 다녀오세요?”
“잡채 하려고 마트에 다녀왔다.”
“무슨 날도 아닌데 잡채를요?”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잖아.”
아버지가 앞치마를 둘렀다. 잡채라니,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누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재깍 잡채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솜씨도 없고 또 손도 많이 가서 못 해 먹는 요리였다. 돼지고기, 양파, 시금치, 당근, 표고버섯, 당면이 아버지의 투박한 손에 이끌려 나온다. 아버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잡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재료를 볶거나 삶을 때 풍기는 고소한 냄새보다도, 재료의 상큼한 색깔이 입맛을 돋운다. 아버지는 속이 깊은 냄비에 수돗물을 받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당면 삶을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아버지는 낱말퍼즐을 풀었다. 예나 지금이나 틈만 나면 저런다. 아버지는 앞치마를 두른 채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서 조용한 놀이에 빠져들었다.
“잡채 먹고 나서 거실의 가구들을 새로 배치해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봄이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잖아요. 봄맞이 단장. 소파를 저쪽으로 옮기고, 장식장을 이곳에 두면 공간이 남잖아요. 여기에 클래식한 전신거울을 놓으면 어때요? 이참에 텔레비전도 바꿔요. 홈쇼핑에서 장기 무이자 할부로. 제가 사드릴게요.”
“헝가리 광시곡을 쓴 작곡가가 누구냐? 첫 글자가 ‘리’다.”
“몇 글잔데요.”
“세 글자.”
“…… 리스트요.”
“리스트? 그렇다면 ‘트’의 세로 열쇠, 북위 50도 상공에서 동쪽으로 강하게 부는 바람…… 아, 제트기류. 리스트가 맞다.”
아버지는 ‘퍼즐 100 단계’를 정기 구독하고 있다. 낱말 맞추기, 반사된 그림 찾기, 숫자 블록, 다리 연결 퍼즐, 고사 성어 찾기, 문장 만들기 등등 잡지를 펼쳐보면 문제의 유형도 다양했다. 아버지는 ‘퍼즐 100 단계’를 받으면 정답부터 뜯어 책상 서랍에 넣어뒀다. 양은 냄비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부글거리는 당면을 주걱으로 휘휘 젓는다. 길쭉한 나무젓가락으로 당면을 몇 가닥 건져 찬물에 씻어서는 천천히 씹어본다.
“아버지가 만든 잡채는 유별나게 쫄깃쫄깃해요. 비결이 뭐예요?”
“비결이랄 것까진 없고, 난 적당히 삶은 당면을 소쿠리에 건져놓고 수돗물을 틀어서 박박 문질러. 물기가 쏙 빠지면 미리 준비해둔 재료를 몽땅 넣고 버무리는 거지. 간장과 참기름으로 맛을 내면서. 더 주래?”
“배불러요. 벌써 두 그릇 째예요. 이따 먹을래요.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또 다른 맛이 나거든요. 오늘 가게 쉬는 날이죠? 요즘도 알바생 구하기가 힘들어요?”
아버지는 묵묵히 젓가락질만 하고 있다.
“아까 말한 대로 오늘 가구 배치나 하게요. 대청소도 하고요. 저도 아버지도 기분 전환이 필요해요.”
“쓸데없이 힘 빼지마라.”
그게 쓸데없는 일인가?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우리가 이 집에서 얼마나 살았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당면만큼이나 매끄럽다. 나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더듬었다.
“이십 년 가까이 됐을 걸요?”
집 안에 퍼지는 내 음성에서 어떤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남은 잡채를 마저 먹었다.
“집이 팔렸다.”
아버지가 식탁 가장자리로 밀쳐놓은 퍼즐잡지를 펼치며 말했다. 흑과 백으로 어우러진 네모들을 보자 어지럼증이 일었다.
“집이 팔렸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번 달 말까지 비워줘야 해.”
“오늘이 팔일인데 이번 달 말까지 비운다고요?”
“그게 조건이야. 즉시 입주.”
나도 모르게 다리를 꼬면서 팔짱을 꼈다. 너무 기막혀서 실소가 터져 나오는 반전이다. 하늘은 파랗고 거리거리마다 촉촉이 스며드는 햇살, 고소한 음식 냄새가 퍼져 있는 따사로운 집 안. 이런 화창함 속에 먹구름이 잔뜩 숨어 있을 줄이야. 머릿속이 뒤죽박죽 헝클어졌다. 이 순간 아버지가 “이렇게 느닷없이 집이 팔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드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지? 두 글자다” 라고 물어볼 것만 같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낱말퍼즐을 풀기 위해 잠깐 연극을 한 것이다. 그럼 나는 주저 없이 ‘황당’이라고 대답할 텐데.
입사 1년차. 그동안 몇 번이나 마음이 흔들렸지만 꾸역꾸역 버텼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나대로 아슬아슬하게나마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그 ‘성실’은 절대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손에 꼭 쥔 채…… 나는 입사 1년이라는 터널을 무사히 통과한 기념으로 어제 아주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왔다.
“어쩔 수 없이 집을 헐값에 팔았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그래도 마이너스야…… 사람처럼 마음이 느껴지는 집이 있다. 이 집이 그랬어. 평수는 작아도 마음이 넓은 집이었거든. 볕도 잘 들고, 새소리도 잘 들리고. 식물도 잘 자라고…… 내가 처음으로 장만한 우리 집이었는데……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어…… 13번 세로, 회화에서 점묘화를 이르는 말…… 29번 가로, 입센의 소설 <인형의 집> 주인공? 방정환의 호?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네…… 갈수록 태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