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두 번쯤 그 노교수를 떠올리면 ‘일십백 운동’이 무슨 이정표처럼 또렷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해 개강 첫날, 카키색 재킷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노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와서는 아무 말 없이 칠판에 ‘일십백 운동’이라고 크게 썼다. 그리고는 엄하면서도 인자한 결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일십백 운동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삼 년 동안 꾸준히 하면 모두 등단할 수 있다!”
귀가 솔깃해지는 단언이었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등단하지 못하면 당신이 책임지겠다는 위험한 장담까지 곁들였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데, 그 일십백 운동이 뭘까.
일
그게 무엇이든 하루에 하나씩 선택해 깊이 생각해라. 삶과 죽음, 아니면 아침에 만난 철쭉, 또는 길가에 떨어진 손수건이나 사무치는 그리움에 대해서. 새 아침을 맞이하면 그 무언가를 머릿속에 들여놓고 온종일 만지작거린다.
십
하루에 원고지 열장 정도의 글을 쓴다. 창작을 하거나 일기를 써도 좋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골라 필사를 해도 된다. 낙서도 상관없다.
백
하루에 원고지로 백장 분량의 글을 읽는다. 철학, 소설, 과학, 시, 신문기사, 동화, 산문 등등 분야를 가리지 말고 다양하게 눈에 넣어라.
일십백 운동은 한마디로 생각하고, 쓰고, 읽는 것이다. 중요한 줄은 알겠는데 그동안 숱하게 들어서 오히려 식상해진 창작의 요건에 ‘일십백 운동’이란 모자를 씌우니까 아주 새롭게 다가왔다. 이게 뭐 어려운가. 생각이야 끊임없이 하고 있으며, 과제 때문에라도 이런저런 작품을 줄기차게 읽어야 하고, 제대로 쓰는 글이 아니라 일기나 낙서도 괜찮다면 ‘쓰기’도 통과다. 삼년이 아니라 삼십 년도 할 수 있다. 이건 일도 아니다. 함께 강의를 듣는 학우들도 나처럼 이런 생각을 했을 터였다. 노교수는 일십백 운동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오늘부터 일십백 운동 시작!
노교수는 잔소리꾼이었다. 강의시간에 해찰을 부리거나, 비문을 써대거나,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주저 없이 말화살을 쏘아댔다. 강의평가를 의식해서인지 쓴소리에 인색한 교수들과는 확실히 색깔이 달랐다. 나는 입으로 매를 맞는 그 시간을 은근히 기다렸다. 노교수에게 한바탕 휘둘리고 나면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면서 일상을 되돌아보게 됐다.
다른 학우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결국 일십백 운동에 실패했다. 일십백 운동의 핵심인 ‘매일’을 지키지 못해서였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실천하다가 술이라도 마시면 다음 날 몸이 찌뿌드드해서 ‘일십’이나 ‘백’만 하므로 아웃. 그럼 월요일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아니 다음 달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행동에 옮겨야지, 하다가 시간이 뭉텅뭉텅 흐르고…… 나도 모르게 일십백 운동 자체를 까먹고 있다가 새해가 열리면 다시 그 운동을 끄집어내는 식이었다.
이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뻔뻔스런 인간이다. 자기는 생각하고, 쓰고, 읽는 행위를 꾸준히 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해대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책이며 글을 읽거나 쓰지 않고 보내는 하루하루가 의외로 많으면서 말이다. 또 곰곰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노교수가 무슨 거래를 하듯 내놓은 일십백 운동은 ‘등단’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요긴하게 쓰일 무기였던 듯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깊이 생각하고, 무엇에 대해 쓰고, 무언가를 읽는 사람이라면 팍팍한 현실을 지혜롭게 헤쳐 나갈 뿐만 아니라, 어느 날 내 앞에 쿵 떨어진 장애물을 용기 있게 뛰어넘을 테니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노교수가 선물처럼 건네준 ‘일십백 운동’의 참뜻을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