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은 아름다움을 남기고, 노을의 미학
사람들은 왜 노을을 보는 걸까? 불타오른 석양 때문일까? 어찌 되었던, 해가지는 찰나의 순간은 거대한 잔상을 남기고 감정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는 건 사실이다. 일몰로 유명한 명소는 세상 어디를 가든 꼭 있지 않던가.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1840~ 1926) ’는 찰나의 순간을 집요하게 화폭에 옮겼다. 특히 일몰 풍경을 많이 남겼는데, 찰나의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석양을 쫓고 또 쫓았다. 강렬한 석양 보며 그린 탓에 시력이 나빠진 일화는 유명하다.
붉은 해가 스스로를 태워 대지와 부딪히기 위해 몸을 던질 때면, 잔잔하고 영롱한 하늘에 주황빛이 물결치듯 일렁인다. 이내 물결이 보라, 쪽빛 호수를 만들면 어둠이 걸어온다. 자연이 그리는 매일 20분의 미학. 영화 <일곱 가지 유혹>에서 남자 주인공 리처드는 과도한 감정 때문에 노을만 보면 눈문을 흘려 사랑 고백에 실패하는데,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도 노을을 보면 미묘한 상태로 빠져든다.
클로드 모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감동적이고, 정신적 예술 표현을 나타내기 위해 일몰을 그린 건 아니다. 그는 눈에 객관적으로 전달되는 색체의 정보, 망각에 맺히는 이미지를 재빨리 그렸을 뿐이다. 색채는 두껍게 덧칠 되었고 붓의 흔적은 자유로우며 형태는 일그러졌다. 일몰 풍경을 객관인 색체로 나타내기 위해 팔레트에 물감을 캔버스에 빨리 옮긴 결과물이다.
꼰대가 싫다. 백수가 싫다. 인상주의의 출현
인상주의가 출현하기 전 유럽의 미술(산업혁명 이전)은 그림에 전통적인 해답이 존재했다. 사과는 빨갛고, 하늘은 파랗고, 공간은 깊이가 있어야 하고 붓 터치는 흔적 없이 그려야 한다는 공식이 수학처럼 존재했다. 르네상스부터 시작된 자연을 얼마나 똑같이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절대적 정답이 존재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작업실에서 장인처럼 도를 쌓듯 붓질 했다.
사진이 발달하면서 똑같이 그려야 하는 작가 직업 정신에 현타의 쓰나미가 일었고, 산업 발달로 튜브 물감이 대량생산되며 작업실이 아닌 실외에서 작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미술가들은 존재의 질문을 시작했다. 쉽게 말해 인공지능으로 기존 직업이 위협을 받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다. 당시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예술가의 생존을 위협했다.
클로드 모네를 필두로 인상주의 작가들은 미술 본질에 대한 질문과 방향성을 화폭에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유럽의 미술계와 평론가들은 고전적인 방법을 고수했다. 인상주의란 말도 처음에는 폄하와 조롱의 의미로 쓰였고 당시 파리의 가장 권위 있는 전시회 파리 살롱에는 출품마저 거부당했다. 세상 어딜 가나, 언제나 변화를 적대시하고 자신들의 권위와 자리를 지키기 위한 꼰대들의 몸부림은 있는 법.
인류 보편적 미학
포스트모더니즘이 창궐해 모든 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금에도 모네의 작품은 인류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다. 2019년 미국 소더비 경매에서 작품 ‘건초더미’는 억 1천70만 달러, 우리 돈 약 1천318억 원에 낙찰되며 최고가를 경신하였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농촌 건초더미에 석양이 비춘 풍경이 여전히 사랑받는 건, 미술사적 가치를 떠나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인류 보편적 미학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노을의 일시적 아름다움 잡으려는건 우리가 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순간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순간, 즉 지금을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순간을 망각한다. 이런 망각은 시간을 무한대로 느끼게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순간은 느리지만 한 달은 너무나도 빠르지 않던가. 일시적인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노을은 잠시나마 우리가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주는 자연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까. 순간마다 진실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삶에 충실하라는 무언의 경고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