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탄력성, 나와 동료에 대한 믿음,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나는 중국 삼국시대를 다룬 드라마,
《사마의: 최후의 승자》를 자주 본다.
좋은 책, 좋은 영화들처럼
처음볼 때는 보이지 않던 장면과 들리지 않던 대사들이
다시 볼 때 보이고, 들리기 때문이다.
최근에 다시 들린 대사는 이것이었다.
"이기는 것만 알고, 질 줄을 모르는 자들이
과연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까?"
이 대사가 들리게 된 나는 잠시 드라마를 멈춰 놓고,
생각을 좀 해보았다.
'질 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몇가지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회복탄력성'에 대한 것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고, 준비한 대로 되지 않지만,
다시 일어서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능력이 회복탄력성이다.
실수해도 용기를 잃지 않고,
실패에서 배움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어야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
넘어진 것에 짜증을 내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자는
'지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계속 잘하다가 단 하나의 실투로 홈런을 맞은 투수가
그것으로 좌절하고, 계속 넘어져 있다면,
그 투수는 거기서 끝이다.
안타를 세 개로 주자가 만루가 된 상황에서 배우고,
용기를 잃지 않고 침착하게 다시 공을 던져
병살을 잡아낼 줄 알아야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
야구에서 투수에게 요구되는 '위기관리 능력'은
심리학의 회복탄력성과 무척 닮아 있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멘탈을 잡을 줄 아는 능력.
투수는 공을 제구력 있게 던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회복탄력성,
즉 위기관리 능력이다.
지는 법을 안다는 것에 대해
두 번째로 떠오른 것은
자기 자신과 동료들에 대한 신뢰였다.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다는 신뢰,
이번에는 혹 일이 잘못되더라도
다시 도전하면 결국 성공할 것이라는 신뢰가 있는 자는
지는 법을 아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나의 부족함을 동료들이 채워서 완성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도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의 특성임을 알게 되었다.
투수는 자신의 공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투수가 자기 공에 믿음에 없으면,
안타를 맞지 않기 위해
스트라이크존으로 공을 던져 넣지 못하게 되는데,
계속 이렇게 승부를 피하다가는 사사구로 타자를 내보내게 된다.
타자가 자신의 공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혹 안타를 맞더라도 다음 타자를 잡아낼 수 있다는 믿음,
투수의 공을 타자가 치더라도, 우리 편 야수들이
아웃시켜줄 것이라는 믿음,
이런 믿음이 있는 투수는 무너지지 않지만,
이런 믿음이 없는 투수는 무너진다.
자신과 동료에 대한 믿음이 있는 투수는
몸이 편안해지고, 제구도 더 좋아지지만,
이런 믿음이 없는 투수는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하다가
몸에 힘이 들어가고, 오래 버티지 못하며,
결국 마운드를 내려온다.
마지막으로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할 줄 아는 자'가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 경기를 보라.
패스를 앞으로만 찔러 넣어서 이기는 팀은 없다.
드리블을 앞으로만 한다고, 돌파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도를 줄이고, 뒤로도 패스를 하고,
옆으로도 패스를 하며, 뒤로 드리블하다가 옆으로 그리고 앞으로
방향전환을 할 줄 알아야 상대의 방어선을 뚫을 수 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강한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적은 적당히 상당해준 후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물러난 후, 적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고,
긴장이 풀어져 있을 때, 별도로 준비해 둔 부대를 통해
기습공격을 감행하면, 기세등등한 적을 물리칠 수 있다.
군사전략 분야에서
전투에서 이긴 직후를 가장 조심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적군이 의도적으로 후퇴한 후에
승리에 도취되어 무방비 상태인 우리 군을 공격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적의 일보후퇴는 이보전진을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인생사 마찬가지다.
아무리 두들기고, 뚫으려고 해도 길이 안나는 곳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이럴 때는 뒤로 물러나고, 내가 지나왔던 길을 되집어 가야 한다.
내가 놓쳤던 다른 갈림길에 도착해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뛰어난 강연자 김창옥씨를 보라.
공고를 나와 대학에 두 번 떨어지고, 군대를 갔다.
대학 쪽에 길이 안나니, 일보 후퇴한 것이다.
군대에 다녀온 후,
음대에 들어가 성악을 전공했으나,
나이 사십이 되도록 성악가 혹은 오페라 배우 등으로 성공하지 못하여
고심하다가 강연자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다시 일보 후퇴하여 갈림길까지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마침내 성공했다.
사실 나도 비슷하다.
경제학을 전공해서 경제학으로 대학원에 가려고 했는데,
경제학과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보후퇴하여
평소 관심이 있었던 심리학과에 지원했는데, 받아주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심리학관련 연구소들에 연구원으로 지원을 했는데,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일보후퇴하여 디자인연구소에 지원을 했는데,
받아주었다.
심리학 커리어에서 후퇴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더 고민하지 않았다.
이렇게 디자인연구소에서 연구원 경력을 쌓고 났더니,
심리학관련 연구소인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서울대에 가서 경력을 쌓은 후부터는 교수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심리학과가 있는 곳에 이력서를 많이 냈다. 하지만 다 떨어졌다.
그래서 다시 후퇴했다.
꼭 심리학과에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교양학부에서 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고,
교양학부 교수에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나의 모습이 되었다.
경기대 교양학부 교수.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일보후퇴는 모두 이보전진이 되었다.
길이 안나는 경제학을 고집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길이 안나는 심리학 연구소를 고집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까?
길이 안나는 심리학과 교수를 고집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국희 인생에 일보후퇴가 없었다면,
여러분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심리학관련 책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이쯤에서 나에게 지는 법을 알려주신
부모님, 선생님, 인생의 스승들에게 감사해야겠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는 법을 알아서가 아니다.
실패나 실수에서 용기를 잃지 않는 법,
나의 노력과 나의 동료를 믿는 법,
일보후퇴가 이보전진이 될 수 있음에 대한 믿음,
이렇게 이국희는 지는 법을 알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스키를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난다.
어린 마음에 리프트를 타고, 슬로프 꼭대기까지 빨리 올라가고 싶었지만,
스키 강사님은 넘어지는 법부터 가르쳐 주셨다.
다치지 않게 넘어지는 법,
넘어질 것 같을 때, 속도를 줄이는 법,
넘어질 것 같을 때, 다른 사람을 피해 넘어지는 법부터 가르쳐주신 것이다.
맞다. 바로 이것이다.
넘어지는 법부터 배워야 스키를 잘 탈 수 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가?
나는 넘어지는 법부터 가르쳐주라고 추천하고 싶다.
*참고문헌
손무. (2023).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잃어야 할 손자병법. 박훈 번역. 탐나는책.
*표지 그림 출처
사진: Unsplash의Greg Rosen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