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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Mar 04. 2021

시골에서는 비밀이 없다

지나친 관심은 간섭이다

지나친 관심은 간섭이다.


도시에서 오랜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마음 편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개인의 독립된 사생활 보호가 잘된다는 점이다. 타인의 삶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모습은 어찌 보면 정이 없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편리한 면이 많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의식주 면에서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이 이래저래 관심을 빙자하여 내 생활에 지나친 의견을 내세우면 이는 자칫 간섭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이래저래 평가한다면 그야말로 간섭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개성을 존중하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는 삶이 도시 사람들에게는 익숙하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특히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내 기분과는 별개로 웃어야 하고, 때로는 웃기지 않은 유머에도 웃는 척해야 하는 예도 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과도한 움직임으로 추임새를 넣어가며 맞장구를 치는 몇몇을 목격한 적도 있는데 어찌나 안쓰럽던지. 저렇게까지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저런 모습을 가족들은 알까, 저토록 낮은 자세로 임했는데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면 어쩌나, 하는 안쓰러움은 지금도 한쪽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나보다 어른이라면 존중해야 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나 회사에서 직책/직위가 높으면 이에 따른 적절한 우대는 있어야 한다. 장유유서라고 해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인생의 선배이므로 어느 정도는 존중해야 한다.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나이 든 사람을 보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익히 배워왔을 테다. 지금은 예전보다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모습도 살아가면서 많이 목격한다. 아이는 아이 같은 모습이어야 예쁘고, 어른은 어른다운 의젓함이 돋보여야 균형이 맞다. 그렇지 않고 무언가로 지나치게 기울면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타인에게 눈총맞는다. 모든 면에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이와 같다. 삶의 기준은 자신에게서 나오고, 자신이 당당하다면 굳이 어려운 추임새로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사실 난 이런 일에는 취약했는데 어찌 보면 처세술에 능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오죽하면 퇴사를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임원과의 마찰이었을까 싶다. 리더라면 팀원의 일과를 낱낱이 꿰차고 있어야 한다며 몰아세우던 사람이 있었는데, 과연 리더라고 모든 부분을 알고 있어야 할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팀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강압적으로 윽박지르는 임원에게 개인은 존중되어야 하며, 리더라고 모든 면을 알 수는 없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된통 당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시골에서는 비밀이 없다.


하나의 사건이 있고, 이 사건이 한 집에서 마무리되면 좋을 테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다. 소문이라는 녀석은 한번 담을 넘으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마을을 잠식해간다. 누구네 집에 도둑이 들었다, 누구네 아들이 속을 썩인다, 누구네 집은 사람이 잘못 들어와서 잘못된 것이다, 등등.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로 고향에서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지만, 당사자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아는 거짓 앞에서 때로는 진실이 무너질 때도 있다. 없던 일도 마치 내가 한 것처럼 둔갑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나친 관심이 간섭을 낳고 결국엔 누군가의 선함이 무너진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하기 전이었으니까 대략 일곱 살, 내겐 지금까지 고향에서 일어난 일 중에 씻기지 않은 상처가 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왔더니 어른 몇이 부모님 주변을 에워싸고 무언가 심각하게 따지는 모습이 보였는데, 알고 보니 내가 무언가 훔쳤단다. 시골에는 정미소가 별도로 존재한다. 방앗간이라고 해서 대형 정미소인데, 이곳을 거쳐야 벼가 쌀이 된다. 방앗간이 한참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엔진을 작동시켜야 할 열쇠가 사라졌고 그걸 내가 가져갔단다. 어떻게 생긴 열쇠일까 궁금하다만 범인은 내가 아니다. 어른 몇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여 할 수 없이 방앗간 근처 웅덩이에 던졌다고 했더니 웅덩이를 퍼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거짓말 말고 사실을 말하라며 몰아세우던 이들, 며칠이고 찾아와 야단법석을 떨던 인간들에 맞서 나를 믿고 나를 대신해 싸워주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가슴에 사무친다. 더 당당하지 못했음에 죄송스럽다.


눈높이 맞추고 귀를 열어야 한다.


나도 모르는 걸 과연 누가 가져갔단 말인가? 내가 가져갔다고 말한 이웃집 할머니의 증언이 유일한 근거란다. 내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나와 부모님을 몰아세우던 그들도 할머니와 함께 모두 고인이 되었을 테다. 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내 잃어버린 유년의 소중한 시간을 되돌려달라고 따지고 싶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몰아세웠으니 그 책임은 누군가 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다.


나보다 어른이고 상급자라면 우대받아야 함은 맞지만,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나이 어린 누군가를 핍박해서는 곤란하다. 어리다고, 제대로 아는 게 없다고 무시한다면 사회는 나이 많은 사람과 경험 많고 아는 게 많은 사람만 존재해야 할 테다. 직위가 높다고 자신보다 낮은 직위의 사원에게 윽박지르거나 강압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이며, 존경받고자 한다면 솔선수범해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제대로 된 상급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 시대의 어른이다. 부족함을 서로 채워나가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 인(人)자는 홀로 서면 위태롭고, 서로 기대야 의미를 가진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지만, 특히 시골은 비밀이 없는 곳임을 귀농하는 이는 명심해야 한다.



Written By The 한결

2021.03.04 대한민국 남해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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