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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Kim Mar 28. 2019

검증된 추억 쌓는 ‘여행 예능’

시험이 아니다, 여행이다.

지난 여름, 기록적 폭염을 피해 러시아 동부로 떠났다. 블라디보스톡은 연해주의 작은 항구도시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으로 유명하다. 국적기로 2시간 30분, 외국 항공으로 북한 상공을 지나면 2시간이면 닿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고도 한다. 물가도 저렴해 잘만 하면 국내보다도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게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급격히 늘고 있다.


SNS에 블라디보스톡의 전망 명소인 #독수리전망대를 검색하면 같은 장소에서 같은 포즈로 찍은 인증샷들이 주루룩 뜬다. 난간 모서리에 걸터앉아 금각교를 바라보는 아름답지만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사실 이 곳은 안전펜스를 벗어난 곳으로 갑작스런 돌풍이 잦아 사고 위험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추락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고 한다. 이 위험한 유행(?)은 다름 아닌 미디어로부터 비롯됐다. 특정 여행 방송에서 출연자들이 취한 포즈를 따라 하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에 가면 꼭 가봐야 한다는 식당들의 리스트가 있다. 대부분이 방송에 소개된 곳들로 메뉴판부터 완벽한 한국어로 제공된다. 간혹 아예 한국어가 가능한 직원이 상주하기도 한다. 한국인들 틈에서 긴 줄을 서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몇 군데는 기다림을 인내하고 방문해 보았지만 금쪽같은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굳이 웨이팅에 할애할 만큼이었는가는 의문이다.


바야흐로 여행 예능 전성시대이다. 과거 다큐멘터리 소재에 지나지 않았던 여행이 예능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여행을 접목한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노년의 여행, 지식 여행, 가성비 여행 등 여행 예능은 쿡방을 넘어 방송 계의 새로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이를 통해 시청자들은 퍽퍽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쉴 곳을 찾는다. 대리만족과 더불어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자막의 친절한 가이드와 함께 이국 땅의 풍광을 즐기는 데에 드는 비용이라고는 와이파이와 맥주 한 캔이면 족하다.


분명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경계하고 싶은 것은 미디어에 노출되는 여행의 모습이 마치 그 곳을 여행하는 ‘모범답안’처럼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명인들이 극찬한 꼭 가봐야 할 곳, 인생샷 포인트, 꼭 먹어야 할 것들로부터 우리는 대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기다림을 인내하며 검증된 추억을 쌓는 것이리라. 물론 방송을 따라 여행을 계획하면 정보 수집은 수월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순례’에 가까워 진다.


획일화된 여행 코스, 얼굴만 갈아 끼운 것 같은 인증샷들과 맛집 리스트 순회. 미디어가 여행을 정형화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보와 자유의 범람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 ‘덜 틀릴 수 있는’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일까. 여행조차 ‘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검증된 길로만 내모는 것은 아닐까.


시험이 아니다, 여행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뇌리에 남는 것은 결국 미션 수행하듯 완벽하게 마무리한 정답 같은 여행이 아니라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걸어간 흔적이다. ‘아 거길 가봤어야 했는데’나 ‘아 그걸 먹어봤어야 했는데’가 아니라, ‘그 여행 참 좋았다’ 단지 이 느낌 말이다.




*동아일보 2018.10.10자 게재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163/3/70040100000163/20181010/92325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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