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대로 나다운 것
우리는 샤모니를 떠나 스위스 체르마트로 이동했다. 한 달 여행 계획을 세울 때, 그는 스위스 영상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르른 자연으로 둘러싸인 마을들. 열차에서 바라본 비현실적인 풍경. 그래서 뚜르 드 몽블랑 트레킹을 마치고 곧장 스위스로 향했다. 첫 번째 도시는 체르마트. 바로 알프스 가장 유명한 봉우리 중 하나인 마테호른이 있는 곳이다.
숙소에 도착하자 마음씨 좋아 보이는 백발의 단발머리 호스트가 우리를 맞아주셨다. 우리의 여행 얘기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계획을 물어오시기에 전혀 정해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니 작은 이 마을에도 좋은 산책코스와 볼거리가 있다며 붐비는 관광지가 아닌 다른 곳들을 추천해 주셨다. 유명한 고르너그라트보다는 호수를 볼 수 있는 수네가가 걷기엔 더 좋을 거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이미 시간이 늦어 하산하는 곤돌라를 타려면 호수만 보고 바로 돌아와야 하는 처지였던 우리에게 산에서부터 숙소로 걸어 내려오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셨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수네가로 급히 향했다.
뚜르 드 몽블랑에서는 끊임없이 두 발로 걸어서 올랐던 산. 갑자기 곤돌라를 타고 너무 편하게 산을 오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걸으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 아깝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도시에서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게다가 일주일간의 트레킹으로 우리의 체력도 이미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 조금은 욕심을 접어두고 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곤돌라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금세 호수가 보였다. 우리는 산 위에 동그랗게 자리 잡은 호수를 한 바퀴 돌며 걸었다. 산 위에 호수가 자리 잡은 것을 본 적이 있었나? 이곳에는 5개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다 둘러보는 것은 포기하고, 숙소가 있는 마을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에 마주하게 되는 호수들만 구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가까운 바위 밑에 몸을 웅크리고 잠시 비를 피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보았으나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 결국 모자를 뒤집어쓰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길을 잃었다. 생각보다 등산로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구글 지도에는 산길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어림잡아 걸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한참을 헤매다 들어온 탓에 배가 고팠다. 우리는 식사 준비를 했다. 스위스의 물가는 듣던 대로 악명 높았다. 편의점에서 매우 부실한 샌드위치 하나를 사도 만 원이 넘었다. 게다가 우리가 머문 작은 마을은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았기 때문에 우리는 숙소의 주방을 빌려 가볍게 요리를 해 먹기로 했다. 마트에서 처음 보는 재료가 있길래 사 왔는데, 보기보다 맛이 없었다. 냉장 보관된 생파스타 종류였는데 검색해도 정보가 딱히 없어 아무렇게나 끓여버렸더니 죽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대충 배만 채우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먹어 치웠다.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인생 얘기를 듣고, 나와는 다른 문화에 대해 물어보고, 서로 다른 시간이 조각한 그들의 사고방식을 배워보는 것. 호스트인 콘스탄즈와의 대화는 너무 즐거웠다. 그녀가 함께 저녁 식탁에 둘러앉게 된 숙박객들을 서로 인사시켜 주는 것으로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그릇을 다 비우고도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다. 창 밖에는 천둥 번개가 치고 있었다. 창이 흔들리고 빛이 번쩍였지만 우리의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인생이야기로 책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좋았다. 우리는 점점 더 그 숙소가 편안해졌다. 밤 11시가 넘도록 대화는 이어졌다.
호스트가 오늘 이 숙소에서 묵는 다른 팀도 클라이머들이라고 하셨다. 우리도 클라이밍을 하기에, 이 근처에 인기 있는 크랙은 어떤 곳이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마테호른이지. 알고 보니 그들은 알피니스트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제야 그들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클라이밍을 오래 한 사람들은 소위 바나나핑거라 불리는 둥글둥글하고 두꺼운 손가락을 갖고 있다. 그들의 구력이 느껴졌다.
우리의 호스트는 그의 단발머리를 보며 한국에서는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이 흔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한국인 손님이 열에 아홉은 된다고 하셨다. 오랜 시간 숙소를 운영하며 겪어본 한국인들에 대한 그녀만의 인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인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십분 공감했다. 한국인들은 서로 너무나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몰개성.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특징 중 하나다.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만의 고유성을 찾고 싶다. 하지만 쉽사리 바뀌기 어려운 부분인 것이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유럽에는 다민족 국가가 많은 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며 살고, 그것이 그들을 다양함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민족, 문화가 섞여 있는 만큼 거리에서 보이는 사람들도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남들과 ‘다르다'라는 것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이미 모두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남들과 다른 모습을 하면 쉽사리 눈에 띄게 된다. 그것이 이곳에서보다 더 신경 쓰이고 불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같았다.
우리 둘은 모두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우리가 남들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미술을 공부하면서 내 것을 찾아가는 것의 가치를 배웠다. 방점은 ‘남들과는 다른 것’에 찍힌 것이 아니다. '내가 나 다운 것'이 중요하다. 자연스러워지는 것.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많은 미디어를 접하고 특히 어떤 것이 광고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소셜미디어를 온종일 보면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의 기둥을 단단히 세우지 않으면 어떤 날은 누군가의 삶이 부러워지고, 어떤 날은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대로 멋지다고 다독이며 다시 마음의 기둥을 세워나가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호스트에게 어려운 부탁 하나를 해야 했다. 여행 동안 가방 가득 들어찬 빨래가 문제였다. 그녀는 흔쾌히 세탁기를 내어주었지만, 건조기가 없다고 했다. 빨아야 할 옷이 너무 많아 걱정인 우리에게 그녀는 걱정 말라며 집안 곳곳에 빨래를 널어두면 된다고 했다. 빨래가 다 되자 그녀는 정말로 여기저기 빨래를 걸기 시작했다. 창문, 소파, 식탁 의자 여기저기에 우리의 옷이 널렸다. 그녀와 우리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는 양 옷을 내다 걸기 시작했다. 빨래가 많아 세탁기를 두 번이나 돌렸다. 더 이상 옷을 걸 자리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옷걸이들을 엮어 더 많은 옷이 걸리도록 만들기도 하고, 문고리와 문고리 사이에 바지를 길게 늘어뜨려 매달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의 집은 온통 우리의 빨래로 가득 차 버렸는데도 그녀는 되려 즐거워했다. 우리가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걱정하니 그녀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신경 쓰라며 빨래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다음 날 아침, 테라스 너머에는 우리가 어제 제대로 인사 나누지 못한 마테호른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저기 널려있던 빨래를 걷고 짐을 쌌다. 커다란 백팩은 숙소에 잠시 맡겨두고 그녀가 알려준 코스로 걸었다. 협곡을 보고 아름다운 작은 마을을 방문했다. 사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어딘가에 간다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낯선 공간을 이처럼 맑은 하늘 아래 걷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만했다.
다음 도시는 스위스 인터라켄이다. 인터라켄은 이름부터 호수 사이를 뜻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번 유럽 한 달 여행에서 호수에서 하는 수영을 가장 기대하고 있었다. 뚜르 드 몽블랑을 걷는 동안 한 번 호수에 몸을 담가 보았지만, 해가 지고 있었던 데다 물이 너무 차가워 제대로 놀지 못하고 텐트로 돌아와야 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다.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내내 호수 생각뿐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던져두고 가까운 호수로 향했다. 잔디밭 옆에 파란 호수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다. 모래사장이 아니라 잔디밭이라니. 초록 잔디와 하늘빛 호수가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우리는 바로 물에 뛰어들었다. 생각보다 물은 찼지만 깊이도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고 해가 따스워 놀기에 딱 좋았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잔디밭에 여유롭게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기분 좋았다. 조금 춥다 싶으면 잠시 잔디밭에서 햇볕에 몸을 맡겼다가 다시 물에 뛰어들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렇게 우리의 인터라켄 여행은 호수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