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없고 마음이 시켜서
이번 한 달 여행의 막바지 일정은 동유럽 도시들을 훑어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정말로 별다른 일정 없이 도시를 거닐 것이다. 애쓰는 바 없이, 편하게 산책하는 것으로 시간을 채우며 마무리하기로 했다. 몇 번씩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하며 도시를 옮겨 다녔다. 우리는 주로 에어비앤비 숙소를 이용했는데, 어떤 날은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아담한 방에서 지내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우거진 정원을 지나 들어가는 대궐 같은 집에서 머물기도 했다. 어느 땐 다소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은 호스트를 만나 눈칫밥도 먹었지만 그럼에도 트러블 없이 몇 날 밤이 무사히 지나갔음에 안도했다. 또 어느 날은 속옷 차림으로 나와 굿모닝! 인사하는 편해도 너무 편한 호스트를 만나 당황하기도 했다. 불편함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선택이었지만 덕분에 기억에 남는 순간들도 더 늘어난 셈이라 나는 이득을 보았다.
그는 뮌헨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영상에는 사람들이 빠른 물살을 타고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신난 얼굴로. 이곳은 영국 정원이라는 곳이다. 드넓은 공원을 가로질러 수로가 지나가는데 그 물살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타야 할 정도로 멀리까지 가게 된다고 한다. 전생에 리트리버는 아니었을지 의심이 될 정도로 물을 좋아하는 그는 이 공원을 놓칠 수 없었다. 물론 이곳은 유럽 스럽지도, 독일스럽지도, 뮌헨스럽지도 않다. 그저 매우 재미있는 곳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재미있게 놀기 위해 그곳까지 갔다. 유럽 같은 유럽은 이젠 실컷 보기도 했다.
그가 이곳인 것 같다며 물소리가 들려오는 울타리 가까이 다가가자 세차게 흐르는 물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물살을 거스르며 서핑을 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다리 위 사람들이 쪼르르 서서 구경하고 있는 것이 서퍼들이었다니. 도심 한가운데서 만난 서퍼의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좌우에서 기다리던 서퍼들은 서로 눈빛과 손짓으로 순서를 양보해 가며 물살 위에 올라탔다. 어떤 이는 오르자마자 넘어져 버리기도 했지만, 어떤 이는 긴 시간 물살을 타며 구경꾼들에게 박수를 받기도 했다. 서퍼들은 나이, 성별 다양했지만, 그중 할머니 서퍼가 인상 깊었다. 온몸을 물에 흠뻑 적시며 요동치는 신체. 서핑에 문외한인 나는 그들의 생동감 넘치는 몸짓만 눈에 담길 뿐이었다. 그리고 서프보드도, 기술도 없는 우리는 물살을 타고 훌렁훌렁 놀다 거리로 나왔다.
이 여행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떠올린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노상의 식당가에서,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서, 땡볕에 빛나는 물가에서 편안한 사람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마주했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우리도 점점 더 사소한 것에는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 되어갔다.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보니 더욱더 특별함은 힘을 잃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저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온전한 시간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문득, 문득 충동이 들 때가 있다. 방금 마주친 멋진 건물에 들어가 보고 싶다거나, 점심을 먹기로 한 식당과는 전혀 다른 식당에 불현듯 자리를 잡고 앉는다거나, 걷다가 발견한 호숫가에 풍덩 하고 싶다거나 하는 충동들 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충동들에 제동을 걸곤 한다. 나 스스로 자각을 하기도 전에 벌써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곤 하는 것이다. 조금 더 나에게 집중해 보면 그런 충동을 따라 흐르듯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프라하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붐비는 상점가를 지나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로 한참을 걸어 오르던 중이었다. 그날 햇볕은 너무나 뜨거웠다. 지나는 모든 이들이 더위에 지쳐 보였다. 우리도 더위를 견디지 못해 길에서 만난 가게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테이크아웃한 맥주도 금세 미지근해질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거북이처럼 느려진 걸음으로 한발 한발 걷다 보니 어느새 언덕배기의 공원을 지나게 되었다. 그 안에 연못이라고 해야 할지 호수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자그마한 물이 있었다. 많진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뛰어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의 그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뛰어들라고, 티셔츠만 벗으면 바지는 금방 마르지 않겠냐며 그를 종용했다. 평소의 여행에서는 없었던 일인지라 조금 주저했지만, 그는 결국 물에 뛰어들었다. 물이 깨끗하지 않아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도 그는 결국 머리까지 푹 담가 잠수하고 뛰어들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오기 전부터 같은 자리를 맴돌던 강아지는 그를 따라 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그 까만 강아지와 우리는 물장구를 쳤다. 뒷일은 생각지 않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그렇게 걷다 보면 햇볕에 언젠간 마르겠지. 그런 자그마한 실천에서 찰나 같은 자유를 느꼈다. 묘하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런 순간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단 생각을 했다.
프라하에서 우리가 매료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굴뚝 빵. 어제 먹은 굴뚝 빵이 맛있어 오늘 꼭 다시 먹고 싶었다. 오늘 아니면 이제 다시는 못 먹으니까. 프라하를 떠나니까. 그런데 시간이 얼마 없었다. 빈으로 가는 기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트램을 타고 굴뚝 빵집으로 갔다. 화려한 굴뚝 빵을 하나씩 손에 들고 다시 트램을 타는 곳까지 걸었다. 정신없이 걸었다. 부랴부랴 트램을 타고 한숨 돌리며 서로를 보니 우리 둘 다 옷에 온통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이 튀어 있었다. 우리는 와락 웃었다. 굴뚝 빵을 허겁지겁 먹느라 엉망이 된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나름 행복해 보였다. 세상 가장 만족스러운 간식을 해치운 사람 같았으므로.
앉을 곳을 찾아 쉬었다가 맛있는 음식을 사 먹고 전시도 보고 멋진 건물에도 들어가 보았다. 여행에선 부지런히 무언가를 했지만, 여행이 지나고 나서 남는 것은 디테일보다는 전체적인 인상이더라. 정말로 꿈속인 듯 헷갈리곤 했던 한 달 여행이 이제 다 끝나간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를 걷는 시간들이 내게는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볼을 한 번씩 꼬집어 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는 걸 막을 방도는 없으니 내가 한 걸음 더 걷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