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만에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다시 올랐다. 후쿠오카는 대학 시절 우리가 처음으로 떠난 해외 여행지였다. 당시 비행기와 호텔을 묶어 파는 에어텔이라는 상품이 생겨 자유여행으로 해외에 가는 사람들이 늘었다. 놀랍도록 저렴한 상품들도 많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대학생들도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후쿠오카 정도는 가볼 수 있었다. 괜히 첫 여행의 추억에 잠겨 비행기에 오르긴 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후쿠오카는 잠깐 스쳐 지나는 경유지일 뿐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등산이다.
공항에서 버스와 전차를 타고 구마모토의 아소시로 넘어왔다. 숙소에 도착하니 이미 하루가 다 가서 깜깜했다. 편의점에서 적당한 요깃거리를 사다가 배를 채우고 쉬었다. 정말 잠만 자고 아침 일찍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해야 해서 자그마한 숙소를 잡았는데, 우리처럼 등산을 위해 이곳에 온 여행자들이 대부분이라 베이스캠프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차분한 조명이 밝혀진 1층 공용공간 게시판엔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이기도 한 아소산과 구주산에 관한 자세한 정보들이 적혀있었다. 겨울 일본 가정에서 쓰는 고타츠에도 앉아보았다. 따뜻한 식탁 밑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컵라면을 먹으니 금세 몸이 노곤해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아침 일찍 택시를 불러달라 부탁드렸다. 우리는 아소산의 들머리인 센스이쿄로 향했다. 친절한 기사님은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오셨다. 우리는 짧은 일본어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기사님께선 날은 좋을 테지만 산 위는 바람이 거세게 불 거라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그 말을 가볍게 들었다. 하지만 아소의 바람은 상상 이상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들머리에 들어서면서부터 산행을 마치는 순간까지 한시도 멎은 적이 없었다. 귓전에 울리는 바람 소리 때문에 짧은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풍경은 고요한데, 내 귓가는 누군가 바짝 쫓아오며 북을 울려대는 듯 정신이 없었다.
아소산은 구마모토를 상징하는 활화산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화산이라는 게 아무래도 낯설 수밖에 없다. 화산지형은 여럿 보긴 했지만, 유황 냄새 폴폴 나는, 지금도 활동하는 화산이라니 호기심이 동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화산의 모습은 뾰족한 산꼭대기에 붉은 마그마가 마녀의 솥단지처럼 보글보글 끓고 있는 그런 만화스러운 이미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일단 흙과 돌의 색부터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고 붉은 흙은 파랗고 하얀 겨울의 하늘빛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었다. 팥죽같이 어둡고 붉은빛을 품어 신비롭게 느껴졌다. 잿가루를 뒤집어쓴 차고 척박한 풍경은 이곳이 옆 나라 일본이 아닌 머나먼 북방의 어딘가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산을 오를수록 조망이 트였다. 푸르지 않아도 조망이라 할 수 있는 것이겠지? 보통의 등산에서 시야가 트인 곳을 내다보면 푸르른 숲과 계곡이 보이겠지만 이곳에선 내 시야에 걸리는 모든 산그리메가 어두컴컴한 잿빛이었다. 산이 둘러싼 모습을 두고 품었다고 표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산을 웅장하고 거대하지만 그럼에도 생명을 가득 품은 따스함이 있는 인격체처럼 여겨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곳 산을 인격체로 그려본다면 말도 없고 표정도 없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그래서 도무지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어두운 장막 속에 숨어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산이다. 걷고 걸어서 빌딩과 도로 같은 익숙한 풍경이 모두 지워지고 나니 이곳은 지구가 아닌 듯 느껴졌다. 우리 걸어서 화성에라도 와버린 것 아닐까.
아소산을 걷는 동안 느꼈던 이 산의 가장 큰 특징은 비어 있음이었다. 공허하게 비어 있는 산. 하지만 그 거대한 공허에 나는 압도당한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하루 삼분지 일은 손바닥 안의 자그마한 스마트폰 액정을 보며 지낸다. 눈앞 30센티 남짓한 거리, 온갖 형형색색의 영상들이 1초도 안 되어 수십 번 바뀌는 그 자그마한 네모. 인간은 원래 자연에 머물며 살았을 것인데, 어느새 네모난 세상에 익숙한 동물이 되었다. 그러니 자연으로 돌아오면 되레 낯설다. 저 멀리까지 시야를 가리는 것 없는 이 단조로운 풍경이 오히려 나에겐 자극 없는 자극이 된다. 대자연을 만나면 끝 간 데 없이 시야를 뒤덮는 푸르름에 가슴이 트이는 걸 느낀다. 그런데 이곳은 그 푸르름조차 없다. 색도 없고 나무도 없고 꽃도 없다. 이런 단순함이 내 눈길 닿는 모든 곳을 이루고 있다. 지구가 이렇게 아름답구나. 화성은 못 가더라도 지구는 구석구석 모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 자체는 크게 힘들진 않았다. 거세게 부는 바람을 제외하고는 특별하게 가파르거나 위험한 구간은 없었다. 능선을 따라 걷는 구간이 길어 체력 소모가 크지도 않았다. 다만 산길 중간중간 갈래 길이 있는데 일본산답게 표지판이 친절하지 않아 조금 헷갈렸다. 그래도 산봉우리 이름들이 다카다케, 나카다케, 즉 높을 고와 가운데 중을 쓰는 봉우리만 찾아가면 되니 천자문도 못 외우는 나라도 표지석을 읽어낼 순 있었다. 바위가 쏟아져 내린 지형들을 지날 땐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바위 더미인지 구분이 어려웠지만 군데군데 잘 보이는 색으로 화살표가 그어져 있어 그것만 믿고 따라 걷다 보면 다시 길이 나오곤 했다. 아소산의 주봉인 다카다케가 1,592m라고 한다. 우리가 출발한 들머리가 해발 900m쯤 된다고 하니 우리가 오른 높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천 미터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의 규모가 체감된다.
관광객들 대부분은 차를 타고 제 1분화구로 바로 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겨울이라 그런지 산중에는 등산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가 걷는 동안 한 서너 명 보았을까. 마주친 등산객 모두가 혼자 온 분들이었다. 나는 혼자서 산을 타 본 적이 없는 탓인지 홀로 묵묵히 걷는 사람을 보면 참 대단해 보이더라. 혼자 산을 걷다가 풍경이 눈에 들면 잠시 걸음을 멈춰 사진을 찍고, 또 군말 없이 걷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 주변 공기도 차분해지는 듯하다. 온전히 산과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아서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점점 멀어져 풍경 속에 사람이 파묻혀가는 걸 볼 때는 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더라.
활화산이라고는 해도, 눈앞에 피어나는 연기를 보고 지독한 유황 냄새를 맡아도, 이 거대한 화산이 폭발한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활동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이 멈춰있는 듯 느껴지는 척박하고 고요한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주름지고 구불구불한 흑빛 풍경 사이에 놓여있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화산의 위험성을 넌지시 상기시켰다. 그 구조물들은 갑작스러운 화산 활동이 있을 시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대피소였다. 아소산 같은 황화산은 화산가스의 분출량이 갑자기 많아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럴 땐 특정 범위 바깥으로 대피가 필요해 해당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붉은 조명들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가 간 날은 화산이 잠든 것처럼 조용했지만, 경고 사이렌과 조명이 번쩍거릴 때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무섭기도 했다. 제1 분화구에 가까워지자 대피 시설들과 안내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을 넘어올 때는 마주치는 사람이 손에 꼽게 적었는데 분화구에는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헬기를 타고 분화구 위를 다녀오는 상품도 있더라. 우리가 분화구와 대피소를 지나 버스정류장을 향해 도롯가를 걷는 내내 분주하게 오가는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누군가 이곳으로 여행을 온다면 나는 제1분화구 너머 주봉 방향으로 조금이라도 더 걸어보길 권하고 싶다. 거대한 분화구만으로도 인상 깊지만, 화산이 만들어 놓은 잿빛 산에 들어가 보는 일도 놓치긴 아까운 경험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달달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가, 숙소 게시판에 소개되어 있던 온천으로 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산 위에 바람이 쉴 새 없이 불다 보니 어느새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하루 종일 찬바람에 얻어맞다 들어간 온탕은 커다란 보상처럼 느껴졌다. 가벼운 몸으로 숙소로 돌아오니 하루를 잘 마무리한 뿌듯함이 마음을 채웠다. 이날 밤엔 다디단 통잠을 잤다. 우리는 다시 짐을 꾸리고 다음 목적지인 구주산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