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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브라운 Feb 02. 2024

갑자기 백수가 되었습니다.

#1 미안합니다. 우리 회사와 맞지 않네요.


"정말 미안한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 과장, 미안한데 우리 회사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수습기간 끝나 계약은 좀 어려울 것 같아."


"네?"


지난해 11월 이직해 이제 수습기간 3개월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는 내게 인사 담당 장님이 말씀하셨다.

2007년에 사회로 나와 17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에 나는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말 그대로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어버렸다. 마주 앉아 회사 입장을 설명해 주시는 장님의 얘기가 귓가에서 웅웅 거리듯 들려왔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나보고 나가라는 거야? 회사에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으레 묻는 안부로 시작했던 장님과의 대화.

오후 근무 중 뜬금없이 잠깐 얘기 좀 하자는 장님의 연락을 받았을 때 뭔가 느낌이 싸하긴 했다. 이제 곧 수습이 끝날 때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마도 근로계약에 대한 얘기일 거라 생각했고 그저 그간 어땠는지, 앞으로도 잘 해보자는 덕담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퇴사라니. 너무 놀라 몸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직


지난해 10월 4일.

9월 말 추석연휴가 끝나자마자 면접을 보고 바로 다음날 합격 통보를 받았던 이 회사. 이곳의 주력 제품은 시스템 가구로 신축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드레스룸, 팬트리, 신발장 등의 가구를 납품하는 회사였다. 인사 담당자는 월 초부터 출근하는 게 좋겠다며 11월 1일에 출근하라 했고 덕분에 난 마음 편하게 다니던 회사 업무를 마무리하면서 10월을 보낼 수 있었다.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이 회사에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랬던 만큼 이제 이곳에서 정년을 채워야겠다 생각했다. 회사도 그만큼 튼튼했고 내 나이도 벌써 40 중반이라 또 이직을 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집에서도 가까워 여러모로 오래 다니기 좋은 회사라 판단했다. 그래서였을까? 첫 출근 며칠 전 대중교통으로 사까지 미리 가보기도 했고 아침 출근시간에 자차로 무실을 찍고 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신입사원 때처럼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 보자고.


11월 1일, 기다리던 첫 출근날이었다.

큰 회사는 아니지만 직원들이 제법 많았고 본사는 안양인데 안산에 공장이 있어 오후엔 안산으로 넘어가 공장을 둘러봤다. 새 건물인 공장 내부 쇼룸을 보고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회사 제품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쇼룸은 회사의 비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내 안에서도 뭔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열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이도 많은 날 뽑아준 회사를 위해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내 나름의 열정.


11월, 공장 OJT


첫 출근인 11월 1일 오후,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한 달 동안 공장으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영업을 위해선 제품을 알아야 하니 공장에서 부품들도 보고 직접 제조라인에도 투입돼서 제품을 빨리 파악하라는 이유였다. 가구 회사가 처음인 내게 회사는 큰 배려를 해준 셈이고 내게는 너무도 좋은 기회였다. 이직을 하고서 이렇게 제조현장 근무를 시키는 회사는 지금껏 없었다. 바로 현업에 투입시키기 바빴는데 이렇게 현장에서 제품을 보고 배운다면 분명 영업업무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회사 카탈로그와 엑셀 파일들로 회사 제품들을 보긴 했지만 직접 보고 만져보는 것만 하겠는가.


그렇게 입사 후 바로 공장에서 현장근무를 시작해 한 달간 있으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부품들도 하나하나 보면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게 됐고 제조 라인에서 직접 제품을 만들어보면서 사무실에서 사진이나 카탈로그를 통해 보던 것보다는 훨씬 자세하게 제품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있기를 희망했지만 대표님께서는 이제 그만 본사로 출근하라 말씀하셨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12월부터 다시 본사로 복귀했다.


12월, 이번엔 현장으로


본사로 출근하니 아침부터 대표님호출이 있었다. 그런데 회의실에서 마주한 대표님의 첫 마디가 꽤나 의미심장했다.


"자네, 내가 생각한 것보다 공장에서 열심히 하지 않은 것 같아."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공장에 있으면서 야근 한 번 빠진 적 없었고 어떤 날은 밤 10시까지 근무하면서 나름 열심히 했던 내게 어떤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그러면서 당장은 영업업무를 하지 말고 현장에서 업무를 배우라 하셨다. 앞서 말했듯 이 회사는 아파트나 오피스텔 신축현장에 빌트인으로 드레스룸, 신발장, 팬트리 등의 가구를 납품하고 있는데 현장에서 설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사전에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등 현장업무부터 배우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회사에서 영업을 하게 되면 현장도 자주 다녀야 하기에 분명 필요한 부분이긴 했다. 대표님의 말씀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번엔도 회사가 내게 좋은 기회를 준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배워야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현장근무가 시작됐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현장은 지금까지 내가 일했던 사무실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일단 아파트나 오피스텔 신축현장은 오전 7시부터 일이 시작된다. 겨울의 아침 7시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깜깜했다. 그리고 항상 안전모, 안전화를 착용해야 하는데 안전모를 몇 시간 쓰고 있으면 머리가 조여와 꽤나 아팠다. 게다가 난방이 전혀 되지 않고 해도 잘 들어오지 않아 무척이나 추웠다. 특히나 12월엔 영하 17도까지 기온이 뚝 떨어진 날도 있었기에 그 괴로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것 보다도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엘리베이터 사용과 화장실이었다. 건설 현장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전기, 가구, 욕실공사, 도배, 미장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한데 몰려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는 항상 만원이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엘리베이터를 한 번 사용하려면 기본 15분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화장실. 엘리베이터 사용이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고층에서 작업 중 화장실에 간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각 층에 간이 소변기를 만들어 놓기도 했는데 문제는 큰 볼일은 해결할 곳이 없다는 거다. 언젠가 신축 아파트의 세대 천장에서 인분 봉지가 나왔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직접 겪어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다.  


이런 현장에서 경력이 오래된 동료와 일하며 새로운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갔다. 처음 접해보는 것들이라 재미도 있고 하나씩 해 나갈 때마다 성과가 바로 눈에 보여 뿌듯하기도 했다. 물론 가끔 '내가 뭐 하고 있나' 싶을 때가 있기도 했지만.


어느 날은 서울 강남 쪽 오피스텔 현장에서 일하다 점심을 먹으러 나왔는데 머리는 안전모에 눌려 푹 꺼져있고 흙먼지가 여기저기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식당에 들어가려니 새삼 꼴이 처량해 보였다. 아마도 여름이었다면 땀에 절어 더 했으리라. 하지만 육체노동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재미가 있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아직 배울 것들도 많이 있으니 환경은 열악하지만 조금 참자 생각했다.


1월, 폭풍전야


그렇게 12월이 지났고 1월이 됐다. 1월이 됐는데도 회사에선 내게 영업업무를 맡기지 않았다.


'아직 현장에서 더 배우라는 건가'


위에서 별 얘기가 없으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계속 현장을 돌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한 가지 불안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대표님의 무관심이었다.


나는 소속은 영업팀이지만 본사로 올라온 이후 계속 현장팀 업무를 하고 있어 영업팀 회의에는 들어가지 않다. 이건 대표님 지시사항이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니 굳이 나를 회의까지 못 들어오게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아직은 영업업무를 하지 않더라도 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슈사항이 뭐가 있는지 알아두면 좋을 텐데 왜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걸까.


그리고 내가 예민한 건진 모르겠지만,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시는 것 같은 대표님이 유독 나에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딱히 대표님과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 느낌이 그랬다. 뭔가 다른 직원들과 나를 대하는 느낌이 달랐다. 그땐 내 착각인가 싶었는데 지나고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직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다른 직원들도 궁금해했다.) 대표님은 분명 어떤 이유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이 상태로 1월 중순이 됐고 1월 19일, 드디어 그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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