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아
통역을 업으로 삼다 보니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브랜드나 기업과 일을 하기도 하고 유명인(셀럽)이나 고위급 인사 (aka 높으신 분)를 만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순차통역이라면 그래도 연사와 얼굴을 마주하거나 같은 공간에 머물기도 하지만 동시통역은 그럴 일이 없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연사는 행사장 앞쪽 무대에 있고 통역사는 행사장 뒤쪽 또는 측면에 위치한 부스 안에 있기 때문이다.
부스 안에서 내가 맡은 연사의 입이 되어 열심히 들으며 통역하다 보면 완전한 몰입의 순간이 오곤 한다. 내가 연사와 하나 되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신나게(?) 통역하고 나면 괜히 그 연사와 친분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 행사에서 누군가를 위해 통역했는데 다른 행사에서 같은 연사를 또 맡게 되었을 때, 혹은 프로그램에 아는 이름이 보이면 혼자 내적 친밀감이 든다. 통역하기 좋은 연사였다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통역하기 어려운 연사였다면 '말이 빠르고 악센트가 있었는데... 참고해서 이번엔 더 잘해야지' 하고 속으로 결의를 다진다. (내가 맡은 연사가 악센트가 있는지, 발화 속도는 어떤지, 말을 어떤 스타일로 하는지 등의 정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다. 짧은 영상이라도 꼭 찾아보는 이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코엑스에서 통역이 있어서 갔다가 반가운 마음에 찍은 사진이다. 이 브랜드는 2011년, 한창 미국 출장 오갈 때 처음 접했다. 미국에서 팀원들과 회식을 했는데 전형적인 '미국식 중국음식'인데 푸드코트 느낌으로 저렴한 가격에 빠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존 중식 브랜드와는 달리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중식으로 고급화한 느낌이었다. 클래식 메뉴부터 독특한 메뉴까지 다양했고 맛도 좋았다.
통번역대학원 재학 시절에 이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어서 지점별 직원 교육 및 회의 등에 통역사로 참여했다. 아무래도 내가 알고 또 맛있게 먹고 경험했던 브랜드인 데다 해외에서 온 교육팀이 굉장히 유쾌하고 통통 튀는 분위기라 더 재미있게 통역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코엑스와 잠실 두 곳을 오가며 며칠에 걸쳐 순차통역을 했고 이 브랜드가 한국에서 잘 자리 잡기를 바라며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후 여기를 지날 때마다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대학원 시절,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예비 통역사'였던 내가 벌써 8년 차 통역사로 먹고살고 있다니. '올해도 정직하게, 성실하게, 무엇보다 신나게 잘해보자!' 스스로 외쳐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