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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칼라책방 Oct 08. 2023

예약 취사 하는 데 걸린 시간, 20년

살림 2-3 돌보기

어느 날 남편이 먼저 퇴근한 날이었다. 평소보다 많이 이른 시간이었기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당시 집에는 아무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밥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 입장에서는 정시 퇴근이었는데 그런 일이 흔치 않았으므로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나 지금 퇴근했어.

지금? 이르네?

어.

근데 집에 아무도 없어.

그래?

근데 집에 밥도 없어용.

...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지.

나 그럼 OO형이나 만날까?

그래요. 그렇게 해요.


그러면서 혹시 남편에게 밥을 좀 안쳐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내 퇴근과 아이들 귀가 시간이 맞물려 있었으므로 밥이라도 있으면 좀 수월할 것 같아서 부탁했다. 그는 알았다고 했고, 잠시 후 그에게 카톡이 왔다. OO형을 바로 만나기로 했으니 밥을 예약하겠다는 문자였다. 


괜찮은 생각이기는 한데 내 기억으로 그는 예약 취사를 해 본 적이 없다. 신혼 때 세탁기를 돌려준다고 하면서 나에게 전화를 100번 한 뒤로 집안일은 가능하면 내가 알아서 했다. 세제를 어디다 넣냐, 어떻게 넣냐, 얼마나 넣냐, 어떤 걸 넣냐, 뚜껑은 어떻게 하냐,,, 정말 백 번은 통화한 것 같다. 나중에는 내가 통돌이 속에서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참 자상한 남편인 건 확실한데 자상한 것과 세탁기 돌릴 줄 아는 것과는 별개다. 별개의 남편이 과연 예약 취사를 할 수 있을지 나는 궁금했다. 결론은 했다. 약간의 어지러움과 여러 번의 카톡 그리고 수정사항이 있기는 했지만 성공했다!! 드디어 내 남편이 예약 취사 기능을 탑재했다~!!! 그 기능을 탑재하는 데까지 20년 걸렸다.


남편을 고도로 훈련시키는 것도 가족 돌보기 영역에 포함되겠지? 가족을 먹이고 입히는 것 외에 무언가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건 곰이 마늘과 쑥으로 동굴에서 21일을 견디는 것과 같다. 호랑이는 결국 사람이 되지 못했으니 열외로 하자. 돌봄의 과정 중에 간혹 어흥! 소리가 날 만큼 당황스러울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애초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와 내가 결혼해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던 건 서로를 돌보는 과정 자체였다. 그리고 아기 셋을 낳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더 치열하게 돌보았다. 여기서 제일 신기한 건 아기들을 사람으로 만든다고 해 놓고선 결국 지나고 보면 나도 그 과정에서 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 되기가 얼마나 바빴으면 사람이 삶이 되었을까. 두 글자가 한 글자로 합쳐지면서.


결론은 내가 돌본다고 하지만 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가족끼리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돌본 것이다.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포장하기에는 머쓱한 웃음이 나오는 순간도 물론 있다. 서로를 미워하고, 소리 지르고, 탓하면서 싸운 바로 그 때다. 아마 호랑이와 곰도 그 동굴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호랑이가 툴툴 털고 밖으로 나온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쑥과 마늘로 연명하며 삼칠일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그러니 서로를 돌보는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건 안다. 알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조차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느라 마음껏 내지르지도 못한다. 너도 나를 만나서 참 고생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의 마음은 무장해제가 된다. 돌봄의 터닝포인트를 수없이 지나면서 점점 사람이 되니 마침내 웅녀가 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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