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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칼라책방 Sep 18. 2024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인생이여

내향과 외향, 도긴개긴

어디선가 들은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나에게 가르친 것인지 모르겠지만 뿌리 깊은 나무처럼 굳건하게 살라고 했다. 굳건? 그게 가능한가? 한때 나는 스스로 개망초라고 여겼다. 굳건은 개뿔, 행인의 옷자락이 만드는 바람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길가의 망초를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도대체 뿌리를 깊게 내리려면 얼마나 더 견디며 무뎌져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공허한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개망초를 유독 사랑하며 동경했다. 너도 나도 흔들리는 인생은 매한가지인데 그래도 너는 이쁘기라도 하지, 꽃이라는 이름이라도 가졌지.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을 감아야 했고, 딸이라는 이름으로 눌러지지 않는 설움을 참기 위해 손톱자국이 나도록 손바닥을 쑤셔댔다. 며느리 노릇은 새롭게 추가된 최상위 미션이었고, 남을 가르친다는 직업은 허울만 멀쩡한 속 빈 강정과 같았다. 그래서 개망초가 부러웠다. 너는 참 좋겠다. 어디 매인 곳 없이 때 되면 피고 때 되면 지는 너처럼 살고 싶다며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내향형이라는 말이 우울과 가깝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무거운 마음을 어디에도 쉽게 꺼내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내가 나를 갉아먹으며 견딜 수 있는 힘을 끄집어내다가 갉을 것이 다 떨어지면 그때는 감당이 불감당이다. 무슨 수를 써야만 한다. 뿌리 깊은 나무들은 저 아래 흙에서 수분과 양분을 뽑아 올린다지만 풀뿌리 개망초는 연한 이파리를 축 늘어트린 채 어서 비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도 아니라면 뜨겁게 내리쬐는 해가 어서 넘어가기를 기다린다. 일몰까지만 견뎌 보자고 이를 악 물고 땅바닥을 부여잡고 있다. 그러니 지나가는 이의 옷자락이 나풀거릴 때마다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다가 해가 떨어지면 한숨 돌리며 이파리도 열고 고개도 든다. 


그렇다면 밖에서 에너지를 채우는 외향형은 뿌리가 깊을까? 우울과 한층 떨어져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울이 내향의 대표 증상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졌을 테니까. 외향인은 아주 튼튼한 마음으로 잘 살아간다는 문장이 어딘가 있었을 텐데 읽은 기억도 없고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 것이기에 마음이 조금 놓이다. 휴~. 나무가 어디선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끈질기게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개망초가 피어날 확률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될 것이다. 그러니 도긴개긴이다. 내 인생은 내향과 외향의 차이가 아니라 오직 '나'에게 달린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스스로에게 느꼈던 미안함이 사르르 녹았다. 왠지 모를 우울한 마음이었다. 내가 나를 갉아먹는 상상만으로도 움츠러들었던 것이 해가 지고 이슬이 내려 개망초의 잎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생생해졌다. 어깨를 펴고 입꼬리에 힘을 주고 살짝 올리니 눈꼬리가 내려가며 인상 좋은 웃상이 되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인생마다 다른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스스로를 보듬어 주기 위해 충분히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다. 창밖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것도 괜찮고, 혼자 달리는 것도 효과가 좋았다. 숨이 차다면 산책을 권하고 싶다. 나를 채우기 위한 방법을 마련하는 건 내향인지 외향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므로 나의 충전기를 어디다 꽂을 것인지 목표점만 잘 설정하면 된다. 나는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책을 읽거나 혼자 운동을 하거나 침대에 누워 공상을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내향형임을 인정하는 바이다.


개망초가 한들거리면서도 끊임없이 나고 지며 도처에 피어 있는 건 바람 따라 흔들린 덕분이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버겁다며 내가 나를 괴롭히며 닦달할 때가 있었다. 물론 아직도 종종 그러곤 한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덜하다. 달라진 것은 운동화와 수영복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인생이 버거워질 때마다 운동화를 신고 달리거나 수영을 하면서 개망초처럼 흔들린다. 이리 휙 저리 휙 흔들리느라 수고한 나에게 웃상으로 보상하며 우울을 털어버린다. 뿌리의 깊이는 상대적인 것이며 너의 뿌리와 나의 뿌리가 만날 수도 있고 안 만날 수도 있다. 다만 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잘 있기 위해 혼자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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