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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요한 연 Jun 01. 2021

아주 열 받았다가 추워진 김에 쓰는 일기


오늘은 어제부터 정해둔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도서관을 개방하는 날이니, 도서관에서 가서 가방을 두고, 근처(도보로 15분 정도. 이 정도면 이젠 초근접이다.) 새로운 퓨전 맛집을 가서 새로운 맛의 우동과 새우튀김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오후 여섯 시까지 죽치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비록 전날 밤에 잠을 도합 두 시간밖에 못 자고 그 와중에 처음 겪는 류의 공포스러운 악몽까지 꾸긴 했지만, 일어나니까 또 사지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기상의 기분은 썩 괜찮았다. 내게는 다 계획이 있었으니까....


대충 밤 샜다는 사진

그렇게 상의는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하의는 갑자기 귀찮아져서 잠옷으로 입던 체육복 반바지를 그대로 입은 힙한 패션으로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근데 한 십분 걷고 나니 후회했다. 반팔 입을 걸. 얇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너무 더웠다. 그렇다고 상탈 할 수는 없으니 대충 가방을 두고, 꾸역꾸역 맛집을 향해 걸었다.


이 대화는 무려 5월 25일 화요일에 한 건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미루다가(미뤘다기 보다는 날마다 더 먹고 싶은 게 생겨서) 드디어 간 거다. 저기가 내 숙소에서부터는 약 40분 거리라 너무 멀기도 했고. 아무튼 도서관에서 저기까지 대략 15분을 걷는데 150분을 걷고 있는 줄 알았다. 진짜 너무 더웠다. 겨우 도착했는데, 아니 글쎄 미친놈들이 문을 안 연 거다. ㅋㅋㅋ 사진을 안 찍었네. 클로즈라고 내일 보자고 걸려있던데, 무슨 가게가 점심 열두 시부터 문을 닫아. 근데 사실 문은 열려있던데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난장판인데 테이블만 다 정리돼 있던 거로 봐서는 그냥 평생 문을 안 열게 됐구나 싶다. 폐업하신 듯. 내일 보기는 무슨.... 미리 전화할까 하다가 에이 당연히 열었겠거니 하고 안 했는데..... 십오 분 전의 나를 혼내며 대책을 강구했다. 여기서 웬만한 밥집은 다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일 가까운 곳은 봉추 반점이란 곳인데, 여기 짬뽕을 맛있게 먹긴 했지만 짬뽕은 썩 끌리진 않았다. 대신 짬뽕하니 백짬뽕이 먹고 싶어 졌다. 근데 또 백짬뽕 집은 무려 이십오 분이나 걸어가야 했다. 봉추 반점엔 백짬뽕이 없나 싶어서 둘러보니 그건 없지만 대신 계절메뉴로 냉우동이 있었다. 오호랏, 냉우동이라? 군침이 좀 돌았다. 그래서 결국은, 냉우동이 된다 하면 그냥 이걸 먹고 안 된다 하면 또다시 이십오 분을 걸어서 백짬뽕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비록 몹시 귀찮고 덥고 고되긴 했지만 백짬뽕에겐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근데 냉우동 된다 해서 그냥 냉우동을 시켰다.


우도에서 우동 먹기

와 근데 진짜 진짜 맛있었다. 살면서 냉우동이란 걸 처음 먹어봤는데, 이걸 처음 먹다니 난 역시 인생을 잘못 살아왔단 걸 또다시 깨우쳤다. 혹시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길 걷다 냉우동 간판을 마주치게 된다면, 유고걸 이효리마냥 고민 고민 하지 말고 당장 들어가기를 바란다. 저 정체불명의 쌈장 닮은 소스도 진짜 존맛. 특히 고기까지 올려주는 건.........이 정도면 청혼 아닌가? 보고 감동받아 울 뻔했다. 신고해야겠다. 혼인신고.


결국 면 한 올조차 남기지 않고 싹싹 건져먹었다. 그런데 다음번엔 개 트롤 오이는 필요 없으니 다 빼 달라고 해야 할 듯. 근데 단점은 먹다 보니 너무 추웠다.  매장이 에어컨이 빵빵했는데, 거기에 시리도록 차가운 냉우동을 들이켜니까 점점 북극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금은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도  아직도 추위가 다 안 가신다. 반팔 입었으면 맛있음+동상 더블 콤보로 그 자리에서 죽었을 듯. 냉우동......다음 번에는 패딩 입고 먹어야겠다. 아 패딩은 지금 없는데.....냉우동을 위해서 패딩을 장만해야겠다....




이건 여담이지만, 나오는 길에 짜글이 집 다단계 아주머니와 우연히 재회했다. 반가워하시며 이제 오리고기도 새로 파니깐 꼭 방문하라고 하셨다. 대충 알겠다고는 했는데... 아니 친구가 없는데 어떻게 가요ㅋㅋ 여긴 다 이인분 이상밖에 안 판다. 인싸 혹은 잔고도 위장도 다 부유한 아싸만 취급하는 잔인한 가게다. 근데 도서관 왔더니만, 사서쌤(?)이 밥 먹었녜서 방금 먹고 왔다 하니깐, 아쉬워하시고는 다른 봉사하는 학생에게 사주겠다면서 둘이서 아까 내가 먹고 온 봉추 반점에서 짜장면과 짬뽕을 배달 주문하셨지 뭔가. 나도 또 먹을 수 있는데.....좀 아쉽다. 그냥 먹었다고 하지 말 걸 그랬나..... 그래도 난 아주 멋지고 근사한 식사를 했으니 괜찮다. 냉우동.....참 맛있었다. 앞으로도 맛있겠지. 거의 그 놈은 멋있었다 급으로, 그 우동은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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