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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꾸꾸 Jun 25. 2023

가랑비에 옷 젖는 줄 알아차리기

힘들면 울든 화를 내든 힘들다고 해볼까?

어렸을 때는 항상 즐겁고 짜릿한 일만 가득하기를 바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세상에는 신나는 일만 가득한 게 아니라는 것을 거듭 깨닫게 되면서 시무룩한 시기가 있었다.

'왜 세상은 매일 행복할 수만은 없는 걸까?'



여러분은 행복하신가요?


요새는 행복하다 혹은 불행하다는 단어를 참 많이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나에게 "선생님, 요즘 환자 많다면서요. 힘들진 않아요?"라고 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그 질문을 들은 바로 그 '순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다.


같은 하루에도 수백 개의 감정이 지나간다. 폭풍 같은 회진을 준비하며 마음속으로 백만 스물두 번은 불행하다고 외쳤으면서도, 한바탕 정리되고 고요한 시간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스라떼 한잔을 들고 쾌적한 당직실의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행복해'라는 말을 한다.


글을 쓰는 지금은 금요일 밤 당직을 마치고 2주 만의 주말 오프날에 혼자 종로 카페에 와 사뭇 기분이 좋기 때문에 또 삶은 몽글몽글 재미진 거지라며 긍정의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참 사람은 감정에 휩쓸리는 간사한 존재 같기도 하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분명 멀리서 보면 꽤나 평온하고 밝은 나날들의 연속임에도, 하루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어딘가 영 불편한 구석들이 있었더라는 것이다.


하루는 처음으로 회진을 돌다가 명치에 쥐어짜는 통증이 생겼고, 어느 날은 목구멍 안으로 코피가 흘러내렸다. 어느 날은 밤새 군인에게 쫓겼다. 꿈속에서 말이다. 난 요상한 꿈을 꾸면 아침에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꿈에 대해 조잘조잘 말하곤 하는데, 내 꿈 이야기를 들은 코크로치가 되물었다.


”누나, 혹시 그 군인들 중에 교수님도 있었지 않았어? “


푸웁 어떻게 알았지



기후와 날씨


매일 행복해야 한다는 일종의 행복강박에 사로잡혀 살았던 과거의 내가 유튜브의 한 영상에서 감정을 기후와 날씨에 빗대어 표현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기후(Climate)와 날씨(Weather)가 어떻게 다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날씨는 매일 변하지만, 기후는 매일 변하는 날씨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평균을 낸 것이기에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기후는 일정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날씨는 일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날씨가 요동쳐도, 멀리서 보면 일정한 기후로 수렴하게 된다.  또 나무가 자라고 풀숲이 무성해지려면 화창한 햇살 다음에 내리치는 빗발의 시원함도 필수적이다.  


감정을 날씨라고 생각해 보자. 매 순간 변하는 일상에 감정 또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울창한 풀숲에 빗방울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나의 감정이 습한 지하실 공기처럼 우중충하더라도 내 인생 자체가 우울한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사람은 많은 순간이 행복하길 바라지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그대로 느낄 줄 아는 자연스러움이다. 늘 인생이 즐거움과 재미로 가득하기를 바랐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알약이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인생의 쓴맛도 느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던 소설 ⟪완벽한 신세계⟫의 존도, 온전한 삶은 슬픔, 분노, 두려움, 짜증 같은 여러 감정을 포용하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 <인사이드아웃> made by Pixar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매일같이 요동치는 날씨에 익숙해져, 어느새 나라는 사람의 기후가 서서히 어둑해져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기후는 안개 낀 서늘한 늦가을 새벽이었음에도 오늘 반짝 뜬 구름 사이 햇살을 애써 찾아내 '그래 아무 문제없어'하고 씩씩한 미소로 나를 속였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회복이 필요함을 알아차렸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 알아차리는 연습

우산을 쓰든 잠시 카페에서 쉬든


대학병원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고등학교 친구 엄쥐가 있다. 내 친구 엄쥐는 어디서나 둥글둥글하게 잘 지내는 은은한 호수 같은 친구였는데, 어제는 오랜만에 쥐(또 다른 친구의 별명)랑 엄쥐를 만났는데 엄쥐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다.

"나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심리검사에서 우울지수가 되게 높게 나와서 상담받았잖아."

아니 누가 우리 엄쥐를 힘들게 한 거야?

당장 쫓아가서 욕바가지를 대신 들이부어주고 싶었지만, 일단 엄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엄쥐는 처음에 상담을 받는 것조차도 일처럼 느껴져서 수 차례 상담 대신 집콕 수면을 택했지만, 끈질긴 연락 끝에 한 차례 상담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난 처음에 상담 가서 별로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나 가서 펑펑 울었잖아."


그렇다. 우리는 누가 툭 건드리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지도 모르고 "나쁘지 않아. 할 만해~"라며 거짓웃음을 장착하고 살곤 한다. 긍정로봇도 아니고 말이다.


"거기 선생님이 그랬어. 힘들면 펑펑 울어요. 여기 와서 우는 사람 천지삐까리거든요. 이상한 거 아니니까 마음껏 울어도 돼요."




나도 이번 달 초에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느라 숨 쉴 틈 없이 일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습관처럼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어둑한 얼굴을 하는 것은 화장실이나 당직실에 혼자 있을 때이다. 굳이 어두운 얼굴과 생각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유는, 부정적인 감정은 전염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든 하면 할 수 있지만, 이러다가 정말 과로사하는 거구나. 물론 과거의 나보다 앞서간 사람들의 환경보다 현재 내가 처한 환경이 훨씬 개선되고 좋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괜찮아? 할만해?"라는 말은 허울뿐인 위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바빠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면, 대신 해결해 줄 거 아니면 묻지를 말던가 하는 심술궂은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물어봐 주기 전에 스스로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 알아야 한다. 온몸이 흠뻑 젖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잠시 햇볕에 옷을 말리고 얼어붙은 몸에 온기를 불어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완벽을 포기하기

어차피 완벽은 세상에 없는 것


20대 후반이 되니 새로운 고민들이 생겨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준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능동적으로 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인생의 길잡이는 딱 대학생 때까지이다. 그 후에 사회에 던져진 우리는 연애, 사랑, 일, 돈문제, 집, 자기계발 등 신경 쓸 일은 한 무더기인데 어느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없이 뭉근하게 계속 이어진다. 


온갖 의무와 책임으로 점철된 매일을 보내다 보니 깨달은 것은 완벽한 끝맺음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무와 책임의 연속선 위에서 즐겁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 위해 내가 찾은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완벽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거듭 완벽함을 포기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애초에 완벽함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면 결국 매일 실패하는 인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어느 때보다 실수를 허용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중요한 시험이나 면접, 수술환자의 수술 플랜을 준비할 때, 정말 중요한 발표와 같은 경우는 당연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실수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엄격한 기준을 일상의 모든 부분에 적용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덜렁댐의 선택적 허용>이라고 부르겠다. 


단, 조건이 있다. 어떤 일에서 한 번 실수를 허용했다면,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 이 노력은 우리를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결코 모든 부분에 있어서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다. 그러니 사회초년생 여러분, 스스로를 너무 자책하지 말자. 여기 당신의 동료 한 명이 또 있다.




Epilogue |


간만의 주말 투오프, 아침 11시까지 유튜브 뮤직을 틀어놓고 느지막이 소파 위에 늘어져 있었다. 아빠가 방에서 나오시더니 '꾸꾸야 아침 먹즈아~'하시는 거다.

요즘 계속해서 할까 말까 망설이던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아빠한테 문득 조언을 구하고 싶어졌다.


"아빠, 딸한테 인생에 있어서 딱 한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해줄 것 같아?"

라고 문장을 체 끝마치기도 전에 아빠는 이렇게 답했다.

"너 자신을 사랑해!"


상남자 스타일인 우리 아빠가 나이가 들더니 여성호르몬이 많아진 건지 요즘따라 감성적인 말을 많이 하더라니, 대뜸 내뱉은 아빠의 조언이 너무 감동적이라서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자신을 사랑해?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아빠?"


"그럼 어떤 고난이 와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가 있어!"

"아빠도 아빠 자신을 사랑해?"

"그럼! 나 자신을 사랑하지!"


그렇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어차피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테니 우리들, 너무 앞서 걱정하지 말자.



>>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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