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지쳤다면 말이죠. <도쿄여행기 (1)>
우리의 삶은 반복의 연속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을 하거나 유학을 떠나는 등 새로운 삶의 단계에 진입할 때마다 우리는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과 불안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과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일종의 동력 또한 얻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곧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고,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안정감뿐만 아니라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는 한다.
그리고 지루함을 느끼게 된 사람을 선택을 한다. 안주 혹은 변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오늘은 어떤 상태인가? 막 새로운 곳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일이 신나고 흥분되는 요즘일 수도 있고, 안정적인 궤도 위에 올라 평온과 지루함이 공존하는 날들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이유가 무엇이든 앞뒤 돌아볼 것 없이 정신없는 하루들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세 번째였다. 앞뒤 돌아볼 것 없이 정신없는 매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의 가장 큰 행복점인 글쓰기와 책 읽기로의 발길이 뚝 끊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빡빡한 일정 탓에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누워 달달한 복숭아를 넣은 그릭요거트를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달콤했던 나는 그 이상의 내면을 채우는 시간까지 생각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저울의 양팔이 공평한 무게를 유지하기 어렵듯이 한쪽에 무게가 쏠리니 다른 한쪽은 가볍게도 날아가 버리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 원래 되게 미래를 꿈꾸며 사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되게 ‘오늘’만 생각하고 사는 것 같다?”
오늘만 생각한다는 것에는 ‘최선의 오늘’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오늘에 압도당해 내일을 생각하기에는 여유가 없다는 의미도 있었다. 오늘이 충분히 배움으로 가득하고 즐겁기도 했지만, 왠지 하루하루에 내가 끌려가는 것 같았다.
나의 삶을 내가 조물조물 예쁘게 만들어나간다기보다 마구마구 쌓아 올리기만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수많은 하루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리기 전에 지난날들의 소중함을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변주였다. 매일같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좋은 동료들과 일하는 지금이 충분히 만족스러우면서도 의사라는 직업 환경 특성상 체력적으로 지치고 소진되어 버리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일터가 좋은 한편 갈등이나 역경, 체력적 고갈이 공존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좋지만 싫은> 교착 상태에서 나는 변주를 선택했다. 완전한 변화도, 완전한 안주도 아닌 변주 말이다.
그리고 일상의 변주를 위해 나는 도쿄로 떠났다.
나의 오늘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기 위해 필요한 여백
내가 있는 서울과 특별히 다르지도 않은 도시인 도쿄로 떠났던 것은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소소한 것들을 포착하고 멀리서 나의 삶을 조망하고 사색에 잠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혼자서 카페에 가거나 단지 음악을 들으며 걷기를 즐기는 나는 도쿄에서도 미술관과 카페를 가는 것 이외에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았지만, 나의 여행이 평소와 다른 점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유와 여백>이라고 답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잠깐의 시간, 여백이 있는 삶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조망하고 의미와 감성을 불어넣어 평범한 하루도 마치 소설 속 한 장면처럼 기억하게 해 준다.
너무 바삐 살아왔던 지난 6개월간의 밀려 있던 여백을 몰아서 채우기라도 하듯 나는 막무가내로 비행기 티켓과 에어비앤비만 예약하고서 도쿄로 훌쩍 떠났다.
작년 도쿄여행에서 아사쿠사 지역에 숙소를 잡았던 것이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던 기억과 아사쿠사의 푸글렌 커피와 우에노공원에서 여유로운 브런치를 즐기며 작년의 여행을 회상하고 싶었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우에노 지역에 에어비앤비를 구했는데, 웬 걸? 우에노라고 다 같은 우에노가 아니었다.
매번 숙소를 잡을 때마다 ‘난 어디서 묵든 잘 지내다 올 자신 있어’라며 숙소를 거침없이 예약해 버린 탓에 나의 여행지 숙소의 역사에는 참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인테리어와 위치는 최상인데 창문이 없었던 프랑스 파리의 에어비앤비, 1850년대 여관 같았던 취리히 호텔, 겉으로 보기엔 쾌적하나 매캐한 냄새와 개미로 고통받았던 발리의 스미냑 호텔.
덕분에 숙소를 구할 때마다 고려해야 할 조건이 하나씩 추가되었지만, 이번에 놓친 것은 제대로 된 위치였다.
우에노 지역이면 다 같은 우에노 지역이라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우에노에서도 북쪽으로 지하철로 20분은 더 이동해야 하고, 한적한 마을 산책 여행지로 유명한 야세넨 지역보다 더 위쪽에 있었다. 심지어 우리 숙소는 역에서 1km는 구불구불 찾아 들어가야 하는 골목길 미로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여행 내내 도저히 길이 외워지지 않아 마지막 떠나는 날까지도 집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매번 다른 골목길을 통해 다녔다면 말 다 한 거다.
도시여행에서 좋은 위치의 숙소라는 것은 ‘역세권’과 ‘관광지 주변’이어야 한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생각보다 나의 다리는 쉽게 지치고, 여행 중간중간에 마음 놓고 쉬고 짐을 놓기 위해 숙소에 들락거리고 싶었다.
지금도 숙소에서 50분 떨어진 롯폰기의 베이커리 카페 Bricolage-bread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구도심의 한적한 골목길 안에 집이 있었던 덕분에(?), 매일 같이 신도심 중심가로 향하는 사람들과 출퇴근길을 함께 하며 마치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현지인 생활을 하다 올 수 있었다.
그토록 바랐던 충분히 멍 때리기를 충실히 수행했던 짧지만 길었던 4박 5일간의 도쿄여행기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