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시던 필름카메라를 발굴했다. 함께 보관하던 필름의 유통기한이 2006년이니 십수 년을 장롱 속에 묻혀 있던 셈이다. 옛날부터 아빠가 우리 가족을 찍어주실 때 사용한 카메라인데 어렸을 적 아빠가 우리를 찍어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직도 베란다 한편에는 현상한 코닥 필름과 인화한 사진이 두툼하게 쌓여 있다. 갓난쟁이 시절부터 초등학교 즈음까지 남아있는 것 같다. 아마 그 후에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었을 텐데 지금은 그때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필름카메라에 얽힌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 9살 무렵에 아빠가 현장 답사 및 기록을 위해 출장에 다녀오신 적이 있다. 다음날 아빠가 출근하시고 집에 홀로 있던 나는 아빠의 카메라를 보고 덮개를 열어 필름을 꺼냈다. 그리고 돌돌 말려있는 필름을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덕분에 필름은 전부 열화되었고 아빠의 출장도 열화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하다.
필름에 대한 이런저런 추억을 가진 덕분에 다시 만지게 된 필름카메라가 퍽 반갑다. 십 년 넘게 잠을 자고 있었지만, 배터리도 남아 있고 작동에 문제가 없다. 렌즈를 분리해 안쪽의 거울을 닦고 이리저리 조작해 본 후 필름을 감아 첫 번째 컷에 아빠를 담았다. 피사체였던 내가 아빠를 피사체 삼아 사진을 찍는다.
사실 필름카메라는 불편하고 느리다. 작고 가볍게 나온 제품이라고는 하지만 카메라 자체의 무게가 꽤 나간다. 필름 한 통으로 24컷 혹은 36컷만 찍을 수 있어서 여분의 필름 챙기기는 필수다. 필름 갈다가 카메라 뚜껑을 열어 버리면 공들여 찍은 사진 몇 장은 빛을 받아 하얗게 날아가 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는 쥐약이라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으면 온통 흔들리고 초점 맞추기도 쉽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찍은 사진을 확인하려면 현상소에 가서 필름을 맡기고 며칠 후에 받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불편함과 느린 속도 덕분에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사진 한 장만 보아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찍었는지 고스란히 기억이 난다. 한컷 한컷이 너무나 소중해서 찍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기 때문이다. 또 스마트폰 카메라와 비교해 렌즈 왜곡이 덜하고 눈으로 보는 것과 비슷해서 실제 눈으로 본 기억과도 가깝다.
여행 마지막 날 새벽 비행기를 기다리며 감기는 두 눈을 부릅뜨고 들어간 식당 천장에 달린 주황색 모빌, 신흥시장 골목에서 조금 벗어난 가게에 사연 많아 보이는 빈티지 수제화, 이별을 암시하는 듯 우산을 든 두 캐릭터 사이를 비스듬히 가리는 그림자, 덕수궁 식물원에 온통 푸른 배경을 뒤로하고 홀로 붉게 핀 동백꽃, 꽃을 잔뜩 싣고 희망을 배달하듯 어디론가 향하던 베트남의 한 아주머니,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뚫고 오른 고비 사막의 모래 언덕과 반대편 언덕에 홀로 서 있던 한 사람, 손가락이 떨어질 듯 추운 날씨였지만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해서 어느 때보다도 포근하게 보낸 12월 31일의 행복한 추억…
아빠의 카메라는 근 사십 년의 세월을 건너 내게 왔다. 아빠의 청춘을 담고, 사랑을 담고, 우리 가족의 행복한 나날을 담았던 카메라는 이제 나의 기억을 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