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과학시간.
일 년치 태양 경로 자료를 조사해 투명 모눈종이에 꺾은선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그래프삼매경인 아이들 틈을 다니며 보다가 잘못 그린 진성이 옆을 지났다.
"여러분, 선을 잘못 그었다면 지우세요. 지우개로 지워집니다."
"선생님 안 지워지는데요?"
그럴리가! OHP필름에 그은 유성펜 자국은 분명 잘 지워진다. 말없이 가서 쓱싹 지우개로 문지르니 역시나 금세 지워진다.
"선생님 아이 있으시죠."
순간 당황했다.
'아니? 나 아이 없는데...?'
옷도 캐주얼하게 입고 아무 꾸밈을 하지 않아서 보통은 나를 어리게 보기 마련인데. 나보고 아이가 있냐니! 그것도 이렇게 산뜻하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다니, 진성아!
당황해 숨을 멈춘 찰나가 지나고, 다행인지 내가 대꾸할 필요도 없게 진이가 바로 말을 잇는다.
"역시 엄마들은 대단해."
아니, 진성아. 나 아이 없어! OHP에 잘못 그은 선 지우는 일 정도로 대단한 엄마라니. 그리고 겨우 선 하나 지웠다고 대단하다 해주다니. 너희는 나보다 훨씬 큰 덩치에 세상 걸걸한 목소리여도, 어린이는 어린이구나. 아직 순수함을 그렇게 보여주니 재미있고 고맙구나.
그런데 실은, 엄마가 될까말까 고민을 하고 있기는 해.
그래서 지나가듯 던진 그 말에 뜨끔했나 봐.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를 품고 낳아 무언가 할 수 있게 되는 그 과정에 동참해볼까 말까, 새로운 큰 파도에 몸을 실어볼까 말까 고민이긴 해.
안 지워질 것 같은 얼룩을 지우개질 몇 번으로 지워주는 일 정도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때론 그것보다 훨씬 하찮고 때론 훨씬 버거운 일들을, 어쩌면 평생토록 뒷바라지 하는 일이 과연 어떨까 모르겠어.
학교에서 여러 어린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이미 지친 마음으로, 내게 가장 소중할 존재에게 소홀할까 봐 미안할까 봐, 고민이긴 해.
아무튼, 내게 아이가 있냐는 질문은 네가 처음이었다 진성아.
아이 없는 성인으로서 내가 나만 알거나 이타심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나에게서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주니 내 안에도 다른 존재를 향한 너른 마음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고맙다.
그리고 너는 전혀 모르겠지만, 요즘 서른다섯의 내 화두에 의도치 않게 불씨를 톡 건드려주어 그 또한 고맙다. 왜인지 나는 정말로, '대단한 어머니'가 되어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는구나.
내가 정말로 그 '어머니'가 된다면, 대단할지는 사실 모르겠지만 말야. 어머니로서 내 아이를 위해 지우개를 지우면서, 똥을 치우면서, 밥을 차리면서, 너는 벌써 잊었을 네 말이 한 번은 떠오를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