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왈 순자왈 고자왈
사람이 본래 타고난 성품은 정해져 있다는 관점. 인성론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구분되는 게 바로 성선설과 성악설, 성무선악설이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는 인간은 선을 취하는 입장이라 주장하고 어떤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게 성선설의 근원이라고 했다. 또, 아이가 태어날 때 아이의 본성은 착하게 태어나고 이후 인간은 주어진 환경적인 요소로 인해 변하기 때문에 선한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환경과 교육을 제공해 선한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 성선설의 목표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선함만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고 본성, 본능 모두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발달하는 과정에서 이 인간의 본성 역시 잘 발달시키고 선한 본성을 쭉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학설이다.
반대로, 성악설은 인간의 성품은 악하고, 선한 것은 '인위'라고 주장하는 순자의 학설이 있다. 인간의 출생과 더불어 품성적으로 악하다는 한계를 지었는데 순자의 선은 인위로써 인간이 노력하였을 때 성취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인간 내면에 있는 본성만을 갖고 있다면 악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제도장치인 법과 규범을 정해 계도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이러한 주장은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한계가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 두 가지 주장과 다르게 고자는 성무선악설, 인간의 품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하였고, 인간의 본성이 선과 불선으로 나눠져 있지 않은 것은 본래 사람의 본성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교육하고 수양하기 나름이며 그 품성은 어느 쪽으로든 될 수 있다 주장하였다.
나는 세 가지 주장 중 성선설을 믿는 쪽이었는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로 태어났고 후천적으로 본인이 처해진 환경과 상황에 의해서 선함이 악함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동물적 본능과 함께 하기 때문에 인간은 둘 모두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이때 자신이 처한 본질인 선함을 놓고 본능과 현실에 타협하며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에서였다.
#1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것인지, 착해야지만 남의 평가에서 그나마 '착하니까'로 관용되는 것이 편해서였던지,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유난히도 착한 아이의 축에 속했다.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게 어떤 상황이던 내 것이 부족하거나, 혹은 합리적인 쪽이 아닌 방향이더라도 나는 애써 '괜찮다'며 조금은 덜 가지거나 손해를 보는 쪽을 택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내심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언정, 불편한 상황을 계속해서 이끌어 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그런 선택이 꽤나 마음 편해했다. 더불어 '착하다'라는 칭찬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붙으니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며 위안 삼고, 양보 아닌 포기를 택하던 바보 같이 착한 아이였다.
#2
맹자가 주장한 학설에서 성선설은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이야기처럼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나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한다 하였고, 어떤 의도가 있거나 이득을 얻게 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그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선'을 이야기했다. 또한 대가 없이 약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측은지심, 자신이나 남의 잘못된 행동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 좋은 것에 대한 거절을 할 줄 아는 마음인 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인 시비지심. 이 네 가지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고 주장을 했는데 나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맹자가 주장하는 '성선설'에 주장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이 프레임은 언제나 나를 '착하고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성선설이라는 단어를 몰랐을 때부터도 줄곧 어려운 사람을 보면 불쌍하고, 또 내가 가진 게 없어도 그들 곁을 떠나지 못하고 끝내 다 돕고만 마는 나의 심성 역시도 문제기도 했다. 이 것은 누가 하라고 강요를 하지 않더라도 불현듯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움직여지는 자동화된 느낌이랄까. 그래서 누군가는 내게 '오지라퍼, 오지랖'이라고 얘기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저나 잘하지'라는 핀잔을 듣기에 충분했다.
#3
나이가 지긋히 먹은 할머니가 폐지를 산더미 같이 주워 리어카에 싣고 끌리지 않는 리어카를 살짝 언덕이 있는 곳을 지나고 있으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제쳐두고 그 리어카를 뒤에서 밀어드리고 두 손 가득 짐이 있는데 머리 위에 봇짐까지 이고 지고 가는 노인을 만나게 되면 내 방향과 다르지만 구태여 그곳까지 어떻게든 최대한 같이 동행해 도움을 드리고 먼 길을 돌아온다.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는 분들 중 땅을 기어 다니 듯 몸을 끌며 찬송가를 트신 분들이 있어 호주머니 속 단 돈 천 몇백 원이 전부였는데 차비까지 몽땅 내어드리고 추운 겨울날 집까지 걸어온다거나, 역 안에 있는 노숙인 할아버지가 추워서 이마트 쇼핑백을 뒤집어쓰고 새벽잠을 청할 때 빵과 우유를 사다가 돈과 함께 놓아주거나… 이러한 행동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고, 이런 일 외에도 언제나 누구나에게 어려운 일, 힘든 일 이 있다면 냉큼 달려가 먼저 도움을 주는 일이 먼저가 되었다.
#4
어린이집 졸업을 앞둔 아들과 지각을 면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며 버스를 환승하던 날도 같았다. 바쁜 걸음으로 아들과 동동 거리며 길을 걸어가는데 멈춰 선 버스와 열린 뒷 문으로 짐을 싣고 가는 끌차와 봇짐이 있는 연세가 많은 할머니가 보였다. 힘을 써서 뒷 문으로 끌차를 올려보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힘이 달렸는지 쉽게 그것들을 올려놓질 못했고, 그저 계단 하나를 넘긴 상태에서 버스는 지연된 체 그대로 정차된 상태였다. 안 본 눈, 못 본 눈을 못하는 착한 어른은 또 기어이 그 자릴 못 지나치고 서둘러 가서 '으쌰' 하며 끌차와 봇짐을 서둘러 계단으로 올렸고 기사님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며 할머니께서 가장 내리기에 좋은 자리로 올라타서 앉으실 수 있게 해 드리고 서둘러 다시 뒷문으로 내렸다. 그리고 지체된 시간만큼 아들의 손을 붙잡고 뛰듯이 걸었다. "엄마, 엄마는 왜 저 할머니를 도와주셨어요?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나는 "할머니 짐이 너무 무겁고 많아서 버스를 못 타는 상황이었어. 힘드셨을 거야. 엄마는 힘이 세니까 얼른 옮겨다 드릴 수 있지!" 하니 아들은 "엄마, 엄마 진짜 착해요. 천사 같아요. 엄마는 힘없는 할머니를 그냥 도와주신 거네요. 나도 엄마 같은 사람이 되야겠다!" 하고 말했다. 나는 단지 할머니를 돕는 분이 아무도 없어서 도움을 드린 것뿐인데,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이었는데 아들은 내가 했던 행동이 '선'을 이루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5
반대로 나와 오랜 시간을 보냈었던 누군가(그)는 횡단보도가 초록불이 깜박일 때까지 마저 길을 건너지 못한 노인을 보며 운전석에서 혈기가 올라 '어느 세월에 길을 다 걷냐, 집에나 있을 것이지. 늙으면 죽어야지. 뭐 하러 집 밖에 나와서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냐' 하며 클락션을 눌러대던 사람이었다. 그저 길을 다 못 건넜을 뿐이고, 종종 거리듯 걸음걸이가 위태했던 노인이었을 뿐인데, 입에 담지도 못할 욕들을 아무렇지 않게 읊조리던 그였다. 이를 듣고 있던 이가 차 안에 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던 순간이었다. 한편으론 맹자가 주장하는 '수오지심'을 나는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성선설 중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이 많은 인간 중 하나다. 그래서 이런 발언은 내게 굉장히 반감이 들던 일 중 하나였으며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들은 '선'하게 살고 싶은 내 마음에 불편함이라는 감정과 위 대상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감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은 분명 성선설인데, 그는 어쩌면 이렇게 성악설에 가까웠을까 싶었다.
#6
성악설, 성선설, 성무선악설. 모두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관점이겠지만 정확하게는 뭐가 옳고 그른지 누구도 명확하게 이 것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 본성과 본능으로 이뤄져 있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악인에 가까운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그것을 바로 잡아줄 딱 한 명의 보호자가 존재한다면 한 인간을 선하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게 돕고, 양심과 도덕성이 있는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여러분은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중 어떤 걸 더 믿으시나요?
사진출처 <pin.it-ilay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