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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개구리 Jul 15. 2020

아버지

언제 어느 때나 자식이 먼저였던...

세면대가 없던 60년대, 아버지는 마당에 간이 세면대를 만들어주셨다.

한겨울 아주 추운 날씨에도 춥지 않게 더운물을 데워 간이 세면대에 부어주시던 아버지는 틈틈이 수학도 가르쳐주셨다.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천자문을 떼게 하셨다. 일곱 아이들 중에는 한자 천 자를 끝까지 다 뗀 아이도 있었고 중간에 그만둔 아이도 있었다.

나도 끝까지 다 떼지 못해서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했는데 중간 정도까지 하고 또 덮어두게 되었다. 부지런히 해서 아버지는 안 계시더라도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한자 하나하나를 외울 때마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나버린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이 생각났다. 머릿속에 가장 입력이 잘되던 그때 끝까지 했더라면 복습만 조금 하면 됐을 것을 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것뿐 아니다. 우리들이 무얼 해달라고 부탁을 하면 아버지는 절대 잊으시는 법이 없다. 돌아가시고 난 뒤 일기장을 보니 노후에는 우리들의 그런 부탁이 아버지 삶의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려 하지도 않았고 아버지가 무얼 부탁하시면 게으름을 피우고 잘 안 해드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불효 막심한 딸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창시한 용어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에서 보듯 아들은 어머니를 좋아하고, 딸은 아버지를 좋아한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처럼 우리 집 딸들도 엄마보다는 아버지를 더 좋아했었다. 엄마한테 직접 이야기해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도 했다.


가정적이셨던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두 아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하고 있다. 학습 계획을 짜면서도 아빠와 의논해가며 공부하던 아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내가 가장 처음 아버지께 배운 은 "길 건너는 법"이라고 기억한다. 대여섯 살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횡단보도에 서서 아버지는 내 얼굴 양쪽에 손을 대시고는 왼쪽, 오른쪽으로 돌리며 차가 오는지 잘 보라고 하셨다. 지금도 길을 건널 때는 아버지의 교육법을 기억하여 그대로 하고 있다.


주변에서 아버지를 싫어하고 아버지와의 추억이라곤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나로선 이해불가의 대목이다. 휴일이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교외로 가족소풍을 가곤 했었다. 철도공무원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은 기차를 무료로 탈 수 있었고 기차가 닿는 곳인 송추, 일영, 서오릉 등이 우리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지금도 그곳을 지나가면 그때 함께 소풍 다니던 부모님이 떠오른다.


요즘은 평균수명의 증가로 8~90세 사는 건 보통이지만 25년 전, 77세로 생을 마감하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언제나 우리 자식들 편에 서계셨던 아버지가 조금은 더 오래 사셨어도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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