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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um Aug 30. 2024

내가 가고 싶은 길

              - Aalborg University에서의 추억

         

-나도 가고 싶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나는 스물여섯에 결혼을 했다. 여기에는 우리엄마의 책임이 크다. 언젠가부터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엄마는 ‘스물여섯’을 넘기면 절대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였는지, 우리 사남매는 남동생까지 모두 스물여섯에 결혼을 하는 역사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평소에 엄마 말씀을 그렇게 잘 듣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그랬는지 모르겠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만났던 남자와는 무조건 ‘일년정도 연애를 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정했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미국으로 유학가고 싶은 욕심이 가득했던 시기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우연히 만났던 소개팅남의 ‘병역문제만 해결되면 바로 미국으로 유학 갈 계획입니다’라는 말이 나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는 병역특례로 연구소에 5년간 근무하고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 그곳에서 퇴직을 앞두고 있다. 우여곡절 가운데, 결국 나는 아메리칸드림을 접어야만 했다. 동시에 결혼과 유학을 동시에 경험하고 싶었던 내 안의 욕심을 적당히 포장해 감추고 시작한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여행 이외에는 한번도 서울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내가 대전에서, 그것도 구석진 촌동네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대로 평생을 아이들만 키우며 이렇게 살아갈 생각을 하니, 우울하고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어머니는 내 학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아마도 주변에 고학력의 스펙을 가진 며느리로 소개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평소에 내 학력에 대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는데, 어느날 시어머니가 친척들에게 나를 ‘명문대 대학원’졸업이라 소개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시어머니의 이런 터무니 없는 행동이 내 욕망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결국은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둘째아이가 첫돌이 지났을 무렵, 대학원에 진학했다.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살기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집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아무도 도와줄 형편이 되지 않아 지역내에 있는 야간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리고 ‘예술치료’라는 새로운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공부를 시작할 즈음에는 누구도 불가능할 것이라 이야기했던, 그런 일들이 내게 일어나 있었다. 막연히 대학 강단에 서서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결국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왔다.

 오랜 시간을 공부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사람은 바로 자유롭게 ‘학회’에 가는 동료들이었다. 학위과정중에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원하는만큼 학회에 다닐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비대면 학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가끔 남편이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주말이면 새벽부터 김밥을 20줄씩 싸놓고서야 서울로 학회에 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서울에 가는 것도 어려웠는데, 해외로 학회에 가는 동료들을 보면 너무 부러웠다. 그렇지만, 일단은 포기하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어느덧 나에게도 해외학회에 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유럽음악치료학회(EMTC)에 참가하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누구도 불가능할 것이라 했던, 전임교수가 되는 행운이 나에게도 주어졌다. 오랜 학위과정을 공부하는 동안, 아이들은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잘 커주었다. 언젠가부터 잠깐씩의 해외출장을 갈 기회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학회’를 위한 해외나들이의 기회를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어느날, 우연히 유럽음악치료학회(EMTC)가 2019년에 덴마크 알보그대학교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미국음악치료학회(AMTA)와 관련있는 활동을 하고 있던지라, 유럽음악치료학회(EMTC)에 가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알보그대학교 출신인 어떤 교수님께서 함께 가자는 제의를 해 주셨다. 그러나 북유럽에 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걱정이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기말고사 기간이었고, 내가 학교에서 방학전에 출장이 아닌 사유로 허가를 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많은 비용을 감당할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알보그 대학교가 너무 아름답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그냥 일을 저질러 버리기에 이르렀다. 예상대로 덴마크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함께 가는 교수님과 일정을 맞추느라 같은 호텔을 예약했는데, 알고보니 특급호텔이었다. 나는 2인 1실로 함께 호텔방을 사용할꺼라 생각했는데, 당황스럽게도 방을 혼자서 쓰시겠다 했다. 내가 언제 또 이런 호텔에서 혼자 묵을수 있을까 생각하고 즐기려고도 싶었지만, 얼떨결에 비싼 숙박비를 부담하느라 좀 당황스럽기는 했다.

 내가 알보그에서 지냈던 열흘동안은 운 좋게도 ‘백야(white night)’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오후 5시가 되면, 다시 새로운 하루가 펼쳐졌다. 학회 주최측에서는 전세계에서 모인 회원들을 위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해주었다. 예를들면, 밝은 한밤중에 깊은 숲속에서 로빈훗 복장을 한 배우들이 나와서 공연을 하고, 바베큐를 구워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작은 맥주잔과 지도를 하나씩 나눠주고, 지도에 표시된 맥주상점에 가서 스탬프를 찍고, 수십종의 맥주를 골라서 맛보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이런식으로 자연스럽게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한 게임을 자정에 가까울때까지 하기도 했다. 그러면 자정이 다 되서야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며칠동안 백야를 경험하다보니, 어느 순간 시간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대낮같이 밝아서, 잠시 호텔에서 암막커튼을 닫고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 벌써 식당들은 다 문을 닫아버렸다. 시계를 보면 저녁 8시쯤 되었는데, 한낮같이 밝았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와는 달리, 저녁 6시면 거의 상점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서 좀 곤란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간단한 술을 파는 상점들도 너무 일찍 닫았다. 외곽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알보그 지역은 그랬다. 그래서 미리 스시도시락을 포장 주문해서 가지고 있거나, 햄버거를 미리 사두거나 했었다. 지금도 알보그대학교 앞에 펼쳐져 있는 호수 근처의 잔디밭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었던 즐거운 경험을 떠올릴 때면, 마치 지금도 내가 그 곳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다양한 주제의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포스터 발표를 들으면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 나라별로 학회원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순서가 되었을 때, 태극기와 더불어싸이의 ‘강남스타일’ 영상이 잠시 나와서 환호성을 받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동양인이 하는 영어가 훨씬 더 잘 들린다는 것이다. 다른 서양인들에 비해 마음이 편해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나름 인종차별이 있는 나라에서 함께했던 동양인들에게 더욱 친밀한 마음이 들었고, 서로 친해지기도 했다. 솔직히, 지금은 학술적인 내용들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도 알보그대학교 곳곳의 분위기는 내 몸이,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유럽음악치료학회(EMTC)에 다녀온 이후에 전세계에 코로나가 퍼졌고, 한동안 해외에는 나갈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때 가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 했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다.    

  

 여행지에서의 즐거웠던 경험들은 내 기억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좋은 기억들과 연합된 경험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을 것만 같다. 학회에 다녀온 후, 알보그대학교에서의 아름다운 추억들과 함께 나에게는 오랜 시간동안 처리해야하는 청구서들도 함께 왔다. 그렇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함을 내 안에 담아두게 되었고, 그 시간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다. 언젠가 내게 다시 알보그에 갈 기회가 오기는 할까?   그렇게 원해왔던 ‘해외학회’에 막상 다녀와보니, 그간의 오래된 열망이 실현된 기분이 들었다. 젊은 시절, 간절히 바랬던 ‘유학의 꿈’이 어느정도 이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비대면 국제학회’가 열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여러모로 좋은 점들도 많으나,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공유하는 공간에서의 사람들이 그립기는 하다. 그 시간들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이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앞으로는 아마도 덴마크에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도 조각조각 떠오르는 걸 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낯선 곳의 여행은 첫느낌이 제일 강렬하기에, 그 느낌을 잘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그냥 한번 갔던 여행지는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는 왜 그렇게 해외 학회에 가고 싶었을까? 그리고 그렇게도 간절히 원해왔던 학회참여의 바램이 이뤄지고 난 지금, 나의 마음은 어떠한가? 한때는 그렇게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해외학회의 참여도 막상 경험해보니, 더이상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들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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