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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라떼 Dec 29. 2023

내가 끓인 죽이 젤 맛있다

사실은 남이 차려주는 밥상이 제일 맛있지만

12월 중순 이후로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이미 잡힌 스케줄과 일들, 그것만 소화하기에도 너무나 바쁜 일정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빵빵 터지기 시작했다. 나의 시간은 24시간이었고 그 시간 안에 어떻게든 끝내야 하는 일들을 붙잡으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다. 정신뿐만이 아니라 몸의 한계도.


"하면 된다!"


라는 말처럼 사실 웬만한 일들은 하면 된다. 할 때는 힘들고 괴롭더라도 그 뒤에 따라오는 뿌듯함과 성취감은 무엇보다도 바꿀 수가 없다. 그렇기에 항상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일단 하고 후회하자!라는 마음으로 살았고 특히나 올해는 더욱더 바쁜 한 해를 보냈다. 중간중간 힘들고 아픈 일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은 덤. 




하지만 12월 27일 수요일, 그동안 잡혀있던 외부 일정과 하고 있던 학습 모임 하나가 끝이 나는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아이 저녁을 차려주고 긴장이 풀린 몸으로 그만 뻗고 말았다. 입속의 구내염은 나아졌다가 다시 생기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휴식이 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빽빽하게 이어진 연말 스케줄에 조금은 후회를 했다. 내년엔 이렇게 잡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으면서 침대에 몸을 누웠다.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이어진 외부 일정에 며칠 집에서 제대로 된 밥을 챙겨 먹지 않았더니 냉장고가 엉망진창이었다. 냉털을 핑계로 냉장고 안을 지키고 있던 음식들을 나의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겨울이기도 했고 슬쩍 봐선 상하지도 않아 보였기에 방심했었는지도 모른다. 




점심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미친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다녀와도 몇 분 되지 않아 배는 또 아파왔다. 한 시간 만에 화장실을 다섯 번이나 다녀오고 나니 미열과 몸살기운까지 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이건 장염 각이다. 그날 오후 내내 화장실을 내 방처럼 쓰느라 밥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이제 나올 만큼 다 나왔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굶을지 뭐라도 먹을지 선택해야 할 시간. 


죽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배달 어플을 켰다. 10분 거리의 위치에 있는 죽집까지 왔다 갔다 할 체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밖을 나가는 것조차 위험한 상황. 언제 신호가 올 지 모르니까 말이다. 가장 근처에 있는 죽집이 배달비를 봤다. 4천 원? 정말 뛰어오면 금방인 여기도 배달비 4천 원이라니, 일단 이 집은 패스하자. 그나마 다음으로 싸 보이는 집을 골랐다. 죽 두 개 세트가 만 오천 원에 배달비도 행사 중이라 2천 원이란다. 좋다 좋아! 이 집으로 하자 싶어서 죽 두 개를 고르러 클릭 한 순간, 기본 야채죽도 +1500원부터 시작, 내가 먹고 싶은 소고기죽이나 새우죽 등은 +1500원 정도를 더 지불해야 살 수 있었다. 그럼 죽 두 개에 거의 2만 원인 셈, 이럴 거면 본죽을 사 먹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배달어플을 껐다.


결국 죽 하나 먹기 위해 이래저래 이만 원 정도를 지출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니 돈이 너무 아까웠다. 가뜩이나 연말이라 모임도 많아서 흥청망청 썼는데 내가 아파서 먹을 내 죽인데도 돈이 아까웠다. 그냥 만들자. 밥솥에 남아있는 밥이랑 뭐라도 넣으면 되겠지. 그렇게 비틀대며 주방으로 나왔다. 


냉장고에는 아이 주먹밥 만든다고 사놓은 소고기 다짐육, 당근, 파가 있었다. 이걸 해먹고도 또 배탈 나진 않겠지. 재료를 잘게 다져 하얀 흰 죽에 투하하고 푹 퍼질 때까지 끓여주었다. 간은 소금과 참치액으로 살짝. 마무리는 참기름 조금과 깨소금. 그렇게 죽 한 그릇을 가까스로 만들어냈다.

너무 배가 고파 그런 걸까, 아니면 하루동안 너무나 고생해서 그런 걸까? 내가 만든 죽인데도 너무나 맛있었다. 배달 안 시키길 잘했어. 셀프칭찬을 하며 후루룩 한 술 입에 떠 넣으며 기력을 찾아본다. 의도치 않게 굳게 된 이만 원은 장염이 낫고 나면 맛있는 걸 사 먹는데 꼭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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